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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미면 신매리 이병숙영세불망비(乷味面 新梅里 李秉淑永世不忘碑)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살미면 신매리 이병숙영세불망비(乷味面 新梅里 李秉淑永世不忘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5. 10. 29. 15:34


살미면 신매리 전주이씨종중 박물관인 영모각 앞에 자리하고 있는 전주인 이병숙의 영세불망비이다.

이병숙(1828-1880)은 조선 후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무신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생(汝生). 아버지는 진사 이상현이다.




1828년(순조 28) 충청도 충주시에서 태어난 이병숙(李秉淑)은 1855년(철종 6) 무과에 급제하여 1857년 선전관이 되었다. 1865(고종 2) 훈련원판관, 첨정, 호조좌랑을 거쳐 1866년 금위영파총을 지냈다. 1866년(고종 3) 9월 프랑스 군함이 침범하여 강화도를 불 지르고 약탈하자 강화유수 이인기(李寅夔), 통진부사 이공렴(李公濂)은 강화성을 버리고 달아났고, 전 판서 이시원(李是遠)은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

조정에서는 이경하(李景夏)를 순무사(巡撫使)로 삼아 강화부를 한성에 설치하고 먼저 중군 이원희(李元熙)로 하여금 병력을 이끌고 프랑스 함대를 공격하게 했다. 하지만 이미 프랑스 군대가 강화성을 완전히 함락시키고 장악한 후였다.



당시 별군관이었던 이병숙은 이현규와 함께 순무천총(巡撫千摠) 양헌수(梁憲洙)에게 야간 도하 작전을 승인받아 10월 1일 밤 강계포수 500명을 거느리고 손돌목을 건너 정족산성에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프랑스 군대가 10월 3일 오전에 정족산성을 공격해 오자 조선군은 총을 쏘아 공격하여 프랑스 군대의 대장과 수많은 병사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에 남은 프랑스 군대는 강화성으로 도망쳐 성안의 중요한 서적과 기물 등을 배에 실은 후 성을 불태우고 달아났다.




이병숙은 정족산성 전투를 승리한 공으로 황해도철도진첨절제사에 임명되었다. 이후 진의 방비책을 강화하여 관문의 경비를 더욱 공고히 했고, 군사와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칭송을 받았다. 조정에서도 이병숙의 공을 인정하여 포상과 함께 수차례 자리를 연임시켰다. 1874년 부평부사, 내금위장, 남양부사를 역임하였으며 1880년 5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이병숙의 저술및 작품으로는 『양박사감결급문보등서성책(洋舶事甘結及文報謄書成冊)』은 1868년(고종 5) 이병숙이 당시의 공사 문서를 모아 책으로 엮은 것으로 53장의 필사본이다. 내용은 1868년(고종 5) 3월 미국의 셰난도어호가 1866년에 대동강에서 실종된 제너럴셔먼호를 찾는 것에 대한 조선의 대응을 철도진을 중심으로 기록한 책으로 날짜별로 정리되어있고, 그 중에는 흥선대원군의 직접 지시까지 포함되어 있다. 당시 셰난도어호의 탐문 항해 자체는 조선 측과 커다란 충돌 없이 끝났으나‚ 조선의 이양선에 대한 대응 과정과 대미교섭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라고 하겠다.


사후 호조판서로 추증되었다. 1868년(고종 5) 나라에서 주관하여 강화도에 이병숙공영세불망비가 건립되었고, 2000년 3월 충청북도 충주시 살미면 신매리 매남에 전주이씨 종중 주도로 복원되었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병숙공 유서(秉淑公諭書)

유 절충장군 행영종포진 수군첨절제사 겸 경기수군좌방어사 진무영좌 해방장 인천감목관 이병숙경수위 일방체임비경범발병응기안민제적 일응상사 자유구장려 혹유여여 경독단처치사비밀부 막가시위 차의외간모불가불예방 여유비상지명 합부무의연후 당취명고사압 제이십오부경기수지고유 동치십년 팔월 이십일일(諭折衝將軍?永宗浦鎭水軍僉節制使兼京畿水軍左防禦使鎭撫營左海防將仁川監牧官?秉淑卿受委一方體任非輕凡發兵應機安民制敵一應常事自有舊章慮或有予與卿獨斷處置事非密符莫可施爲且意外奸謀不可不預防如有非常之命合符無疑然後當就命故賜押第二十五符卿其受之故諭同治十年八月二十一日)


해석) 명 절충장군 행 영종포진 수군첨절제사 겸 경기수군좌방어사 진무영좌 해방장 인천감목관 이병숙 경에게 한 지방의 병란방어임무를 맡기노니 몸을 바쳐 경솔히 하지 말고 범상하게 군사를 보내되 기회를 보아백성을 편안케 하고 적을 제압하는 것은 일단 정해진 일이다. 이는 옛 법령에 있으나 혹 염려가 되는 바가 있다면 나와 더불어 경이 단독으로 일을 처리한다면 명령이 아니라도 어쩔 수 없이 시행하게 된다. 또 뜻밖에간사한 무리가 꾀를 부리는 일이 있다 해도 마땅히 미리 막을 비상명령이 있을 것이다. 명령에 의심함이 없이 연후에 마땅히 임무에 나아갈 것이다. 그런 고로 서명한 병부 제 이십 오부를 내리니 경은 이를 받으라 명령이다.


유서(諭書)는 후손들이 보관하고 있는 문서로 병숙공이 받은 동치 10년 즉 1871년에 받은 유서(諭書)이다. 해석
문도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그대로 소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