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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정면 동막강현길 우병옥호국영령추모비(嚴政面 동막강현길 禹柄玉護國英靈追慕碑)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엄정면 동막강현길 우병옥호국영령추모비(嚴政面 동막강현길 禹柄玉護國英靈追慕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5. 10. 30. 07:29

 

 

우병옥은 충주 출신의 군인이다.우병옥은 1925년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신만리에서 태어나 엄정초등학교와 경성공립공업학교를 졸업하였다.

우병옥의 추모비는 신명재단소속인 충원고등학교 후문옆에 비석이 위치하고 있다.

우병옥의 비석은 비석군중 비석을 바라보며 가장 좌측에 있는 비석이다.



비석의 전면에는 고우병옥대령호국영령추모비(故禹柄玉大領護國英靈追慕碑)라고 음기되여 있으며 비석의 뒷면에는 우병옥의 행적이 적혀있다.

비석의 건립시기는 1976년 5월로 음기되여 있다.

 

 

1946년 육군사관학교를 1기로 졸업하여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으며, 1948년 육군본부 정보국 차장과 인사국장을 거쳐 1949년 중령계급으로 제3사단 참모장이 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김포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전사하였다.

 

1950년 8월 20일 대령으로 추서되었으며,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위패가 모셔져 있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우병옥 대령에 관한 글을 찾던중 2015년 6월28알 국방일보를 접하게 되였다

6·25전쟁 발발 사흘 뒤인 6월 28일, 북한군 6사단은 국군 지휘부가 전혀 예측하지 못한 김포반도로 도하, 김포비행장을 탈취했고 영등포 방면 한강방어선 측후방을 위협했다.

한강방어선을 책임지고 있었던 김홍일 장군은 ‘김포지구전투사령부’(이하 ‘김포사’) 사령관 우병옥 중령에게 김포비행장 탈환을 지시했다. ‘김포사’는 김포반도를 방어하기 위해 급히 편성된 부대였다. 비행장 탈환의 공격대장은 전날 비행장을 적에게 내주어 ‘김포사’ 사령관 직무대행에서 해제된 최복수 중령이 하게 됐다.

김포사의 공격은 6월 29일 10시30분쯤 시작됐다. 최복수 중령은 직접 지프를 타고 최전선까지 나와 부대의 전진을 독려했다. 기갑연대 혼성대대가 대대장 강문헌 대위를 선두로 활주로 입구로 나아가던 중 잠복하고 있던 적의 기습을 받았다. 강 대위는 대대원들과 응전했으나, 정보장교와 함께 적탄을 맞고 쓰러졌다. 이들을 구출하고자 달려간 장갑중대 2소대장 김정운 소위의 장갑차도 적의 대전차포에 피격됐다. 기갑연대 혼성대대는 공격 초기 대대장을 잃게 됨으로써 선임중대장 김일록 중위가 대대장을 대리해 공격을 재개했다. 사투 끝에 활주로까지 진출했지만, 건너편에 있던 적의 기습공격으로 큰 피해를 봤다.

비행장 탈환이 무위로 돌아가자, 공격대장 최복수 중령은 지프를 적진으로 돌진시키며 기관총을 난사했으나 운전병과 함께 전사했다. 김포비행장 탈환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김포지구전투사령관 우병옥 중령도 원미산으로 올라가 작전 실패에 책임지고 권총으로 자결했다.

비록 ‘김포사’는 김포비행장 탈환작전에 실패했지만 6월 26일 급작스럽게 창설돼 김포반도 일대에서 사흘 이상 적의 공격을 지연시켜 한강을 건너지 못한 국군이 행주 나루 일대에서 무사히 건너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6월 30일부터 7월 3일까지 오류동 일대에서의 공방전으로 ‘한강방어선’ 서측방으로 진출하려는 적의 기도를 좌절시켰다. 이로써 국군은 6월 28일부터 7월 3일까지 6일 동안 한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군의 한강 도하를 저지함으로써, 유엔군이 참전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됐다. 최복수 중령 등 ‘김포사’ 참전용사들을 오늘만이라도 기억해주었으면 한다.[국방일보.장성수중령 육군군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