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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읍 수진리 권기묘갈(槐山邑 水津里 權技墓碣) 본문
괴산읍 서부리에 있는 조선초기의 문신인 권기(權技,1405-1467)의 묘소이다.
권기의 본관은 안동이고 세종때 과거에 급제하여 요직을 거친후 63세에 졸하였다.
1470년(성종1)조성된 묘소는 사각호석(422*535)을 두르고 봉분바깥으로는 사각담장을 둘렀다.
아마 권기의 묘뒤로 있는 하양허씨의 무덤과 경계를 두기위해 담장을 두른 듯 하다.
망주석과 상석 그리고 장군석과 석등을 새로 조성하여 세웠다.
권기의 묘갈은 묘소 앞쪽에 비각으로 보호되고 있다.
묘갈은 약 255센티 크기로 묘갈은 1470년 성화경인(成化庚寅)에 건립된것으로 서거정(徐居正,1420-1488)이 짓고 홍흥(洪興)이 썼다.
비갈이 위치한 수진리는 서부리 동진천 북쪽에 있는 마을로 향교가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향교말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동네앞에 나루가 있어 수진(水津)이라고 하였다.
權技 墓碣
有明朝鮮國通政大夫 行江陵都護府使 兼江陵鎭兵馬節度使 權公之墓
公之諱技 公之籍安東大姓 曾祖諱皐 檢校侍中謚忠靖公 祖諱僖 檢校左政丞諡靖簡公 考諱遇 藝文舘直提
學 號梅軒 鳴以文學 母貞夫人南陽洪氏判事 諱斌贊之女 永樂乙酉六月庚寅生 公自少好藝武學 世宗乙酉中
司馬試 壬子登科 辭藝文檢閱累遷司憲監察 戊午參試官 取進士申叔舟等百人 辛酉以兵曺佐即 ▨▨取權崇
淳等拾八人 歷諫院正言憲持平兵刑兩曺正郞 陞知司諫議右司諫大夫左司諫大夫 ▨▨ 有諫臣風擢僉知中樞
院事 賜原從功臣之號 俄帶內禁衛將申重夏 以謝 ▨▨使赴京仍還兵馬江陵府使仍兼本道節度副使 俄復舊職
丁亥十一月辛卯以疾卒于柯亭 享年六十三 明年戊子二月壬寅受于禮葬 謚加文正公 葬于槐山治北五里許校
村後水津洞壬坐丙向之原 夫人塋同坐 公資性和毅氣肅▨▨ 治家雍睦莅官後 謹報好詩文有大幹局 而不大厥
施惜哉 公娶星州李氏 按撫使興文之女 生三男五女 男長慄▨▨ 兵曺佐郞 登壬子科 次忱 乙酉進士 女長適
金仲權 次適生員許憺 次適司直許崇 三子悰 登庚辰武擧 次適別提柳彭壽 次適將仕郞李元亨 次適護軍趙云
聰▨▨▨▨▨▨▨▨ 餘幼 慄娶星州李氏 監察李洧之女 生男仍女二幼 忱聚宜寧南氏執義南秀文之女 生二
男一女 悰聚龍仁李氏▨▨▨▨▨ 仲權生男運許憺 生二男 長粹 次精 女五幼許 崇生三男幼彭 壽生二男幼
公▨▨▨▨▨▨▨▨▨ 諱風之女也.
皇明成化庚寅 寒食立石
戚侄 正憲大夫行議政府左參贊 兼藝文舘大提學知成均館事同知事 徐居正 誌
朝奉大夫漢城判官 洪 興 書.
묘갈의 비문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국립문화재연구소]
유명(有明) 조선국 통정대부(通政大夫) 행 강릉도호부사 겸 강릉진병마절도사(行江陵都護府使兼江陵鎭兵馬節度使) 권공(權公)의 묘(墓)
공의 휘(諱)는 기(技)이다. 공의 가문은 안동(安東)의 대성(大姓)으로 증조부 휘 고(皐)는 검교시중(檢校侍中)을 지냈으며 시호는 충정공(忠靖公)이다. 조부 휘 희(僖)는 검교좌정승을 지냈으며 시호는 정간공(靖簡公)이다. 부친 휘 우(遇)는 예문관 직제학을 지냈으며 호는 매헌(梅軒)이며 문학으로 이름을 떨쳤다. 모친 정부인(貞夫人)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판사(判事)인 휘 빈찬(斌贊)의 따님이다.
공은 영락(永樂) 을유년(태종 5, 1405년) 6월 경인일에 태어났다. 공은 어려서부터 기예(技藝)와 무학(武學)을 좋아했다. 세종 기유년(세종 11, 1429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임자년(세종 14, 1432년)에 등과했다. 예문관 검열을 사직하고 여러 차례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무오년(세종 20, 1438년)에 참시관(參試官)으로서 진사(進士) 신숙주(申叔舟) 등 100인(人)을 선발했다. 신유년(세종 23, 1441년)에 병조좌랑으로서 ~ 이하 2자 빠짐 ~~ 권숭순(權崇淳) 등 8인(人)을 선발했다. 사간원 정언(正言), 사헌부 지평(持平), 병조와 형조의 정랑(正郞)을 역임했으며, 사간원 지사(知事), 사간원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사간원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에 올랐다. ~ 이하 2자 빠짐 ~ 간신(諫臣)의 기풍이 있어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발탁되었으며 원종공신(原從功臣)의 칭호를 하사받았다. 얼마 후 내금위장(內禁衛將)을 겸직하였으며 신중하(申重夏)가 ~ 이하 두 자 빠짐 ~ 사(使)에서 물러나 서울로 가자, 인하여 병마강릉부사(兵馬江陵府使)로 돌아왔으며 인하여 본도 절도부사(節度副使)를 겸하였다. 조금 있다가 옛 직책에 복귀하였다.
정해년(세조 13, 1467년) 11월 신묘일에 병환으로 가정(柯亭)에서 졸하였으니 향년이 63세였다. 이듬해 무자년(세조 14, 1468년) 2월 임인일에 예장(禮葬)을 받고 문정공(文正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괴산의 북쪽 5리쯤에 있는 교촌(校村) 뒤 수진동(水津洞) 임좌병향(壬坐丙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의 묘도 같은 자리에 썼다.
공은 성격이 온화하면서도 굳세었으며 기품은 엄숙하고도 ~ 이하 두 자 빠짐 ~ 하였다. 집안을 다스림은 화목하게 하였고 관직에 나가서는 삼가서 보답하였다. 시문(詩文)을 좋아하였으며 일을 잘 처리하는 재간과 국량이 있었으나 크게 시행해 보지는 못하였으니, 안타깝도다.
공은 성주 이씨(星州李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안무사(按撫使) 흥문(興文)의 따님이다. 3남 5녀(역자주 - 원문은 5녀이나 문맥상 6녀의 오기로 생각됨)를 낳았는데 장남 율(慄)은 --이하 2자 빠짐 -- 병조좌랑으로 임오년(세조 8, 1462년)에 등과하였다. 차남 침(忱)은 을유년(세조 1, 1465년) 진사시에 합격했다. 장녀는 김중권(金仲權)에게 시집갔으며, 차녀는 생원 허담(許憺)에게 시집갔고, 셋째 딸은 사직(司直) 허숭(許崇)에게 시집갔다. 셋째 아들 종(悰)은 경인년(성종 1, 1470년)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넷째 딸은 별제(別提) 유팽수(柳彭壽)에게 시집갔으며, 다섯 째 딸은 장사랑(將仕郞) 이원형(李元亨)에게 시집갔고, 여섯 째 딸은 호군(護軍) 조운총(趙云聰)에게 시집갔다.
이하 8자 빠짐 ~ 나머지는 어리다. 율(慄)은 성주 이씨(星州李氏)에게 장가들었으니 감찰(監察) 이유(李洧)의 따님이다. 1남 2녀를 낳았는데 딸 둘은 어리다. 침(忱)은 의령 남씨(宜寧南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집의(執義) 남수문(南秀文)의 따님이다. 2남 1녀를 낳았다. 종(悰)은 용인 이씨(龍仁李氏)에게 장가들었는데 ~ 이하 5자 빠짐 ~ 중권(仲權)은 아들 운(運)을 낳았다. 허담(許憺)은 2남을 낳았는데 장남은 수(粹)이고 차남은 정(精)이며, 딸 다섯은 어리다. 허숭(許崇)은 3남을 낳았는데 어리다. 팽수(彭壽)는 2남을 낳았는데 어리다.
공(公) ~ 이하 9자 빠짐 ~ 휘 풍(風)의 따님이다.
황명(皇明) 성화(成化) 경인년(성종 1, 1470년) 한식(寒食)에 비석을 세우다.
척질(戚侄) 정헌대부(正憲大夫) 행 의정부 좌참찬 겸 예문관 대제학 지성균관사동지사(行議政府左參贊兼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同知事) 서거정(徐居正) 기록하다.
조봉대부(朝奉大夫) 한성 판관(漢城判官) 홍흥(洪興)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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