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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읍 대덕리 전씨양세정효문(槐山邑 大德里 全氏兩世旌孝門)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괴산군(槐山郡)

괴산읍 대덕리 전씨양세정효문(槐山邑 大德里 全氏兩世旌孝門)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2. 16. 19:58

 

전씨양세정효문을 대하는 순간 스치는 기분은 뭐랄까?

돌보는이 없이 잡목과 잡풀로 뒤덮혀있는 정려문을 보며 효라는 의미가 퇴색되여 가는 느낌이랄까?

가족관계의 단촐함과 더불어 가족간의 관게가 소원해 지는 지금의 현실과너무 맞아 떨어진다고 할까?

진정 효라는 것은 무엇일까 효의 본질은 변함이 없겠지만 효라는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는 계기가 되였으면 한다 

 

전씨양세정효각은 정선전문(旌善全門)의 효자 전후성(全厚成)과 전덕윤(全德潤)의 정려로 세운 것이다.
전후성은 성품이 인후하여 예사역(隸史役)에 봉공함에 있어서도 그 누가 부친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고, 부민(賦民)을 공평하게 다스렸다.

부친이 등창이 나자 독을 입으로 빨아내었고 상을 당하자 관아에 나아가기 전에 성묘하기를 3년을 하루같이 하였다.

모친이 위중하자 양손을 착지주혈(醍指注血)하고, 상을 당하매 시묘함이 전과 같았다.

정조 4년(1780)에 정려되었다. 이후 효자 전덕윤의 정려를 합설하였다.
정려각 안에는
 “孝子 贈資憲大夫兵曺判書兼知義禁府訓鍊院事行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全厚成之門”(증자헌대부병조판서겸의금부훈련원사행가선댑동지중추부사전후성지문)이라 적혀있고 “孝子 贈童蒙敎官朝奉大夫全德潤之門”(효자증동몽교관조봉대부전덕윤지문)이란 편액 2점이 있다.
건물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이며,「全氏兩世旌孝閣」이란 현판을 걸고 보호책을 둘렀다.

 

 

 

 

 

전후성은 본관은 정선으로 성품이 진솔하고 근엄하며 어질고 후덕하였다.

관아에 딸린 구실아치로 예속되여 일할때는 아버지에게 누가될까 걱정하고 백성들에게 부역을 시킬때도 아버지가 근심할것을 염려하여 아주 조심하여 한번도 가볍게 행동하거나 아버지의 뜻을 잊은 적이 없었다. 아버지에게 심한 종기가 나자 이를 입으로 빨아내여 낫게 하였으며 또한 병세가 몹시 위중하게 되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먹이려고 하였으나 어머니가 눈치를 채여 적극 만류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마침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가슴을 치며 통곡하더니 기절하였다가 깨여나기를 여러번 하였다. 그러나 늙은 어머니가 있어 마음대로 울지 못하고 빈소를 마련하고 아우 전후손과 함께 빈소옆에 움막을 짓고 밤낮으로 울면서 곡을 하였다.

 

장례를 마치고 관아에 매인 몸이라 무덤옆에 여막을 짓고 지낼수 없자 19리밖에 있는 무덤을 날마다 새벽에 찾아가서 곡을 하고 돌아와서 관아로 나가기를 아무리 날씨가 험해도 거르지 않고 3년을 한결같이 하였다.

후에 어머니의 병세가 몹시 위중하자 오른쪽 손가락을 끊어 피를 먹여도 소생하지 아니하자 이어서 왼쪽 손가락을 끊어 피를 먹여 며칠동안 목숨을 연장시켰다. 어머니가 마침내 돌아기시자 애통해 하면서 장례와 상례를 아버지가 돌아가셨을때 처럼 하였다.

 

이 일을 주위에서 일제히 관아에 알리니 잡역을 면제해 주었다.

1780년(정조4년)에 정려되여 현재 괴산읍 대덕리에 정려문이 있다.[괴산군지,괴산군삼강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