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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덕읍 대곡리 전학동효자비(周德邑 大谷里 全學東孝子碑)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주덕읍 대곡리 전학동효자비(周德邑 大谷里 全學東孝子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6. 16. 06:42

 

효자비는 원대곡 큰골 서쪽산 능선 끝자락에 서 있다. 화강암으로 만든 효자비는 대석, 비신, 지붕돌로 구성된 일반형이다.

주덕읍 대곡리 원대곡 큰골에 위치하고 있다. 비신 : 56.5×26×159 ㎝ 지붕돌 : 101×71×52 ㎝ 받침돌 : 96×70×5 ㎝입니다.석곡마을로 진입하는 도로에 우사가 끝나는 지점 오른쪽 산기슭에 묘소가 위치하고 있다. 

 

 

 

전학동은 조선 말기의 효자로서 자는 명습(明習), 호는 월파(月坡), 본관은 천안이며 전영덕의 아들이다. 천성이 인자하고 부모에게 정성을 다하여 봉양하였다. 10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애통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성장함에 그 아버지를 효로서 봉양함에 조석으로 안부를 살피고 맛을 보고 공양하고 의복을 갈아드리는데 자신이 직접함에 게으름이 없었다. 또한 장날이면 짚신을 팔아 입에 맞는 음식을 사다드리는데 한 때라도 빠지는 법이 없고 아버지가 병을 얻어 위독하매 관대를 풀지 않고 약을 구하였으며 단을 모아 하늘에 기도하고 허벅다리를 베어 환약을 만들어 드렸더니 효험이 있었다. 아버지의 상을 당해서는 애통을 금치 못하고 시묘살이 3년에 빗질을 하지 않을 정도로 극진한 정성을 다하였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여 문행으로 유명했으며 통정대부에 추증되었다.

 

 

 

碑題 : 孝子通政大夫天安全公學東之碑
음기 : 忠原大谷之區有石以旌之曰近故孝子通政大夫天安全公學東之碑或曰石旌古乎曰邃古 之世無孝之榜非無其人也無人而非其人也自世降之也不能無人而非其人故貤贈綽楔復 徭之旌興焉世又爲今或有其人而無旌其人之人則以石代之使行自紀焉來者勤焉旌若是 而己奚古今之有按公所爲孝者亦惟曰下氣愉色養其志而己矣甘旨溫淸養其口體而己矣 亦惟曰前後待疾遑遑焉行不正履寢不交睫禱天請代而己矣亦惟曰三年之喪顔色之戚哭 泣之哀而己矣亦惟曰葬之以禮祭之以禮而己矣而無一毫異於人者蓋實錄云余喟然歡曰如全公者可謂孝矣夫聖人亦人耳何嘗而於人哉孝子亦人子耳何嘗異於人之子哉人焉而 盡人之道謂之聖子焉而盡子之道謂之孝如全公之孝者可謂鹿子之道者也今之語孝子動 以鯉筍稚虎爲口實其於全公豈不天壤哉雖然吾聞全公割股爲丸以療父疾此可異焉竊謂 戕身於父母之疾者恐非先王之訓而若出於至誠求吾父母之生雖百體可也奚論一股之肉 哉蓋建碑之論發自首善地而今微文者其過房男泰鎭也 通政大夫楊根郡守原任 奎章閣直閣 恩津宋奎憲 撰嘉義大夫吏曹參判兼同知 經筵成均春秋館義禁府事奎章閣直提學侍講院檢校輔德 驪興閔秉承 書

 

 

 

비석의 전면에는 효자통정대부천안전공학동지비(孝子通政大夫天安全公學東之碑)라고 음기되여 있으며 후면에는 전학동의 행적을 기술하였다.효자비 비석은 명륜회장충주군수전석영이 주축이 되여 기묘(己卯)4월에 건립하였다 기묘년은 비석의 상태나 충주군수 전석영등의 근무기간등으로 보아 1939년에 해당된다.전석영은 일제강점기 시절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며 관직으로는 괴산군수(1925), 영동군수(1927), 충주군수(1932-1942) 를 지낸 친일파 명단에 오른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