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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덕읍 화곡리 김극충효자문(周德邑 花谷里 金克忠孝子門)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주덕읍 화곡리 김극충효자문(周德邑 花谷里 金克忠孝子門)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6. 17. 10:12


주덕읍에서 요도천을 건너 계막마을로 접어들면서 우사를 지나 좌측 산모퉁이에 있습니다

김극충의 효자문 옆에는 애국지사 김낙인의 송덕비가 자리하고 있으며 뒷쪽동산에는 김극충의 아버지인 김호의 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김극충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1742년(조선 영조 18)에 명령된 정려(旌閭)이다. 김극충은 조선 선조때의 효자로 임진왜란 후인 선조 27년(1594) 3월 9일 강도 수십명이 침입하여 아버지를 해하고자 하는 위기에 처했을때 그는 아버지를 구하고자 아버지에게 달려들어 감쌌으나 칼을 맞아 그 자리에서 죽게되었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게 되어 1736년(영조 12)에 향리의 벼슬아치와 유생들이 상소하여 1742년에 뜻을 모아 정문을 세웠다고 한다. 마을 어귀 길가에 남향으로 배치된 정려는 정면 1칸 측면 1칸 겹처마 맞 배지붕의 목조기와집으로 사면에는 홍살을 두르고 측면에는 풍벽을 달았다.
단청이 잘 되어 있으며 건물 내부에는 ‘효자증통훈대부사헌부집의김극충지문(孝子贈通訓大夫司憲府執義金克忠之門)’이라 판각한 현판이 걸려있다





건물의 구조는 2단 장대석으로 위에 1단의 원형주좌(圓形柱座)를 조출(彫出)한 초석을 놓고 원형주를 세워 이익공(二翼工) 계통의 공포(栱包)를 구성하였다. 익공의 선단(先端)에 연봉(蓮棒)이 장식되고 대량(大樑)의 외단부(外端部)에는 봉두(鳳頭)를 부착하였으며 창방(昌枋)으로 결구된 주간(柱間)에는 화려하게 초각(草刻)을 한 화각반(花刻盤) 1구를 놓아 주심도리(柱心道里) 장혀를 받쳐주고 있다.
가구는 양측 대량 상부에 대공(臺工)을 설치하여 굴도리의 종도리를 받치도록 한 삼량집으로 건물 모두에 단청을 하였다



김극충의 효심을 기리기 위한  효자정이다. 이 마을의 유명한 화개산 기슭 남편으로 우뚝솟아 그 위용을 자랑하며 자리잡고 있는 효자정은 이 고장에 주거하는 토박이 풍산 김씨문중의 정려이다. 공은 1553년에 출생하셨는데 정성이 至孝하여 늘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빛으로 먼저 부친의 뜻에 맞추고 수신하기에 혼신의 정성을 다했다. 父君 金鎬는 1562년 군수직을 사임하시고 1592년 충주 주덕읍 사락리 황금곡 즉 지금의 계막골로 낙향하신 낙향조이시다. 공께서는 3남을 두셨는데 장자(長子) 김극충, 차자(次子) 김극방(金克邦), 3남 김극가(金克家)인데 2분 아우님들은 외직으로 나가 계시고 장자인 김극충이 아버지를 모시었다. 그는 아버지의 시탕과 봉양을 다하고 슬하를 떠나지 않으니 향단에서는 물론 관민들의 칭송을 한몸에 받았으며 이때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갓 겪은 난리에 집에는 저축이 없고 또한 흉년이 들어 유랑민이 모두 굶주려 떼를 지어 도둑이 되었다.
이때 아버지의 시탕에 여념이 없었던 늦은 봄 어느 날 밤 도둑놈 수십 여명이 손에 흉기를 들고 돌입하여 부군을 범함에 황급히 빈손으로 양팔을 벌려 누워계신 부친을 덮쳐 가로막으며 “앗 이놈들 나의 부친의 털끝도 건드려서는 안된다. 내 부친은 아무 죄도 없거니와 지금 병환중이시다. 썩 물러서지 못할까? ” 꾸짖어도 고함쳐도 맨손 대 무기와 다수 대 단독이 어찌 적수가 되랴! 나중에는 “네놈들이 피를 봐야 흡족하겠거든 내 부친의 명을 나와 바꾸자꾸나”라고 애걸도 해 봤건만 무도한 무리들의 흉기는 그의 등과 다리를 3,4회나 내려 꽂혔다. 비명과 신음소리가 심야의 적막을 깨고 잠든 마을이 술렁이기 시작하자 놈들은 줄행랑을 쳤고 방안에는 유혈이 낭자한 가운데 그는 이미 눈을 감았고 부친 김호는 효자의 덕으로 상처는 좀 가벼웠지만 숨을 겨우 쉬고 계시었
다.그때 멀리 살던 차남 직장공(直長公)과 3남 사과공(司果公)께서도 달려와 임종할때 부친은 유언으로 ‘너희들은 이제부터는 문무(文武)를 함께 익혀 한편으로는 국가의 적을 물리치고 또 한편으로는 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도록 명심할 것이다.’고 하시며 눈을 감으시니 곧 1594년(甲午) 3월 29일로 낙향조이며 중시조인 김호(金鎬 : 郡守公府君)가 옥쇄하신 날이고 김극충이 만고의 효자로 이름을 떨치게 된 날이기도 하다.
이 정려는 손자되는 時萬 司僕 공이(1599년) 조부의 효행을 기록한 효행실기(孝行實記)란 책이 있었는데 이 책은 그가 돌아가신 후 141년이 지나서야 후손 瑞五씨가 옛고리짝을 정리하다가 김시만(金時萬)이 기록한『효행실기』를 보고 깜짝놀라 즉시 우선 이 사실을 지방유림에 알리고 집요하게 현감, 군수, 감사에게 알리면서 중앙관서에 계시는 동추공(同樞公) 김하석(金夏錫)과 그의 아들 夢 씨에게 시켜 영조대왕에게 자기 고조부의 목숨바친 절효에 은전을 나려달라고 상언한 일이 정려(旌閭) 건립에 결정적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부자의 헌신적 노력이 꽃피어 드디어 영조 18년(1742) 3월 28일 김극충 집의공의 효자문이 충주시 주덕읍 화곡리 계막마을에 세워져 수백년 내내 세인들에게 효를 일깨워주고 있으니 우리들이 효를 물려받아 되새길 산교육장이 되고
있다.[주덕읍지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