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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덕읍 화곡리 숭조당(周德邑 花谷里 崇祖堂)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주덕읍 화곡리 숭조당(周德邑 花谷里 崇祖堂)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6. 28. 06:38

 

주덕읍 화곡리에 위치하고 있는 풍산김씨 충주파 중시조인 김호의 재실이다.원래의 용도는 풍산김씨문중의 강당으로 문중교육시설이였으나 지금은 재실로 사용되고 있다.지명도 강당에서 유래하여 강당길로 불리우고 있다.

 

 

 

풍산김씨 유래와 충주 입향조인 시조(始祖) 김문적(金文迪)은 안동부의 풍산현 사람으로 고려조에 벼슬이 판상사(判相事)로 풍산백(豊山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풍산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게 되었다. 풍산김씨 충주파 시조의 휘(諱)는 호(鎬)이며 관은 내직 통훈봉상시정이며 외직은 군수이다. 그는 시조(始祖) 문적의 13세손이다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는 김호의 묘지입니다. 묘지밑에는 아들인 김극충의 효자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의 名祖는 6대조 고려 봉익대부 삼사 좌윤 휘 안정(安鼎)이고 그의 아드님 휘 자량(子良)인데 고려조의 시중이고 조선조에서 5조의 판서를 역임한 후 대제학을 배명받았고 고조는 종해(從海)로 생원이며 증조는 술산(述山)이며 기묘사화에 절사(節死)했고 조는 순로(舜老)로 성균관 생원이고 부는 원길(元吉)로 안변교수이며 모는 밀양 박공진사 박세번의 여식이시다. 호는 어려서부터 효심과 우애심이 극진했고 서화담 선생문하에서 공부하여 을묘년(1555)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조선조 화담 서경덕 문인록에 등재되어 있다. 그후 임술년(1562)에 다시 과거에 합격, 여러 현, 군의 성실하고 근면한 관리로서 이름이 높았고 귀임 후에는 거사비 등이 세워졌다. 1593년에는 고양군수로 나갔다가 다음해 노환으로 파직하고 돌아와 충주 덕련리로 전 가족을 인솔하고 낙향하여 강도사건으로 요양중 별세했다.

 

 

 

공은 1526년 7월 23일에 출생하여 1594년 3월 29일에 졸하니 향년 69세이다. 처음 장지는 괴산이었으나 1602년에 이안의 번릉산의 창학포란형에 이장했으며 배위(配位)는 청송 심씨이다. 3남이 있는데 장남은 극충이며 목숨을 바쳐 부친을 구한 대효로 영조때 정려를 받아 사헌부 집의에 추증되었고 차남은 극방(克邦)이며 통훈 상의원직장이고 3남은 극가(克家)로 절충장군 용양위부사과였다

 

 

 

김호의 장남인 극충은 효자로 이름이 높다.

효자 김극충은 1553년생으로 아버지 군수공이 이곳 충주로 낙향하여 천성이 지효하시고 지내셨는데 부군이 부임하시면 가사를 포기하시다시피 따라가 슬하를 떠나지 않으니 향안에서는 물론 관민의 칭송을 한몸에 받았던 효자이시다. 집의공의 춘추42세로 시탕에 여념이 없을 때 강도 수십명이 군수공을 범함에 맨손 대 무기와 단독 대 다수가 어찌 적수가 되랴 집의공의 등과 다리를 향해 3, 4회나 나려 꽂혔다 그로인해 집의공은 절명되었고 아버지는(군수부군)효자의 덕으로 상처는 가벼웠지만 임종하셨다. 때는 1954년 3월 29일 우리 낙향조이며 중시조인 군수부군 부자분이 옥쇄하신 날이고 집의공의 만고 효자로 발돋움한 날이기도 하다.조선 선조때의 효자로 임진왜란 후인 1594년(선조 27) 3월 29일에 강도 수십명이 침입하여 아버지를 해치고자 하는 위기에 처하게 되자 김극충은 아버지를 구하려 아버지에게 달려들어 감쌌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칼을 맞아 그 자리에서 죽게 되었다. 참으로 하늘이 낸 효자였다. 이 뜻이 조정에 알려지게 되자 1736년(영조 12)에 향리의 벼슬아치와 유생들이 상소하여 1742년(영조 18)에 뜻을 모아 정문을 세웠고 김극충에게는 통훈대부 사헌부 집의에 증직했다.

 

 

 

지금의 재실이 있기전에 건물은 강당이라 하여 2007년 주덕읍지에 소개한바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부지는 약 990㎡이며 강당의 실면적은 260㎡로 목조건물의 기와지붕이며 행랑은 목조건물에 스레트 지붕이다.
처음 건축된 시기는 1770년으로 가선대부행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行同知中樞府事)를 지낸 김하석(金夏錫)을 중심으로 풍산김씨 10여명이 주축이 되어 현위치에 강당을 세우고 현재까지 수십차례 수리 및 단청을 거듭하여 오늘날까지도 잘 보전관리되고있다.이 강당에서 수학한 유생들은 청운(靑雲)의 뜻을 품었던 진신장보(搢紳章甫:높은벼슬을 한 사람)와 여러 선비가 많이 배출되었으며 그 정기가 전해져 오면서 오늘날에도 석박사를 비롯한 교수들도 꾸준히 배출되고 있고 현재 후학들도 자기 능력에 따라 성심을 다하여 곳곳에서 이름을 빛내고 있다. 현재 강당에 유생은 없고 집을 관리하는 사람만이 살고 있으며 고려말(高麗末) 시중(侍中)으로 계시던 김자량(金子良) 이하 4대 조고(祖考)의 묘소가 황해도 개풍, 은율, 송도 등 지금은 북한에 모셔져 있어 가지못하고 5대(代)봉사를 9월 중 정일(丁日)로 날을 받아 낙향조(落鄕祖) 군수공(郡守公) 김호(金鎬) 후손 충주파 회원들이 모여 제(祭)를 지내고 있다.[주덕읍지]


지금의 재실은 강당자리에 2008년도에 신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