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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은면 가신리 명성황후피난유허비(老隱面 佳新里 明成皇后避難遺墟碑)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노은면 가신리 명성황후피난유허비(老隱面 佳新里 明成皇后避難遺墟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8. 22. 18:17

 

안내판이 잘되여 있으니 찾기는 쉽다.이곳 가신3리는 몇번이고 걸음을 한곳이다.명성황후유허지를 알리는 유허지비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동네초입에 명성황후노래비가 생겼다, 유허지비 앞에 널려있는 빨간고추가 세월의 무상함을 이야기 해주는 듯 하다.

 

 


충청북도 충주시 노은면 가신3리에 있는 조선 말기 명성황후 피난지이다.


1882년(고종 19) 6월 9일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명성황후는 서울을 탈출하여 고향인 여주의 민위영 집에 숨었다가, 장호원에 있는 민응식의 향제를 거쳐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을 찾아가던 중 자취를 감추기 위해 충주시 노은면 가신리 국망산 밑 신흥동 이시영의 집으로 피신하였다.이시영은 이시일(李時鎰)[1818~1900]의 잘못된 기록으로 보이며, 어머니를 모시고 초가집에 가난하게 살며 나무를 팔던 총각으로 명성황후를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명성황후가 50여 일간의 피난 생활을 마치고 환궁한 후 그 은공으로 음성군수가 되어, 마을에서는 그의 집을 ‘이음성 집’이라고 불렀다. 『고종실록(高宗實錄)』에는 행궁과 비석 건립을 위한 상소가 기록되어 있으며, 가신리 신흥생활관 앞 담장 밑에는 격식과 형식을 갖춘 화강암 지대석과 주초석 등이 흩어져 있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명성황후가 피난했던 이시영의 집은 3칸 초가로 추정된다. 후에 이를 바탕으로 ㄱ형 집을 지었으며, 현재는 기단만 남아 있다. 행궁을 지으려 했던 터는 충주시 노은면 가신3리 515-2번지[신흥3길 13] 일대의 공터로 추정된다.

 

 

 

명성황후 민비와 충북 피신지 - 충북과 나의 연결고리 '충북일보' (inews365.com)

 

명성황후 민비와 충북 피신지

집권전 흥선대원군은 안동김씨 세도가 김병학과 그의 딸을 며느리로 삼기로 밀약했다. 그러나 집권하자 마음이 달라져 고아나 다름없는 여흥민씨 명성황후를 왕비로 간택, 한 살 연하인 고종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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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피난지인 이시영의 집 터는 충주시 노은면 가신3리 558번지[신흥2길 20, 지적도상의 대지 512-1]에 있다. 노은면 소재지인 연하리에서 지방도 520호선을 따라 서쪽으로 3㎞ 지점에서 가신3리로 들어가 500m 정도 가면 나온다.피난지는 기록과 기단으로 보아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一형 민가 형식의 초가로 추정된다. 행궁 터에는 480㎜×480㎜×180㎜ 정도의 방형 대석 위에 지름 약 350㎜의 원형 주좌 2개, 350~360㎜×350~360㎜×260~480㎜ 정도의 방형 초석 4개, 지대석 2개가 있다.그 밖에 마을에도 화강암 초석과 지대석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큰 규모의 건물을 조성하려고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00년 노은면 우성리에 살던 김하석의 단자를 통해, 행궁을 건립하려고 초석과 목재 등을 마련하다가 동학농민운동으로 중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가 신변의 안전을 위해 피신하였던 피난지와 행궁을 지으려 했던 유허지로서 명성황후에 얽힌 산교육의 장으로서 의의가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