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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니면 문숭리 숭선사지당간지주(薪尼面 文崇里 崇善寺址幢竿支柱)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신니면 문숭리 숭선사지당간지주(薪尼面 文崇里 崇善寺址幢竿支柱)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8. 22. 18:19


동네이름도 숭선마을이다. 숭선마을 마을회관앞에 짝을 잃고 혼자 덩그러니 서있다.

예전에는 가까이 있는 가축우리 한켠에서 외로움을 깁고 있었지만 지금은 보호울타리도 두르고 다시 새단장을 하였다.

가까운 숭선사지는 지금도 발굴이 한창이다.

당간지주가 위치한 문숭리(文崇里)는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숭선리(崇善里)의 상숭리(上崇里)·중숭리(中崇里)와 상사리(上寺里)·점촌(店村)·문내리(文內里)·내포리(內浦里)[일명 속개]의 일부를 병합하고 문내리와 숭선리의 첫 이름을 따서 문숭리(文崇里)라 하였다.




능안고개를 넘어가는 수리산 자락의 깊은 골짜기에 일찍이 전주이씨 경영군파 후손들이 들어와 세거하고 있다. 1757~1765년에 편찬한 『여지도서(輿地圖書)』 충원현조에 따르면 충주군 신니곡면(申尼谷面) 숭선리 지역이었다.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숭선리의 상숭리·중숭리, 상사리·점촌·문내리·내포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문내리와 숭선리의 첫 이름을 따서 문숭리라 하고 신니면(薪尼面)에 편입하였다.


마을 북쪽 수리산(修理山)[641.6m] 아래 좁은 골짜기를 따라 숭선리가 양옆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수리산 밑 신덕저수지(만수 면적 82.28㎢) 아래쪽으로 비행장들·번지머리들·관돌들·긴들 등이 곡창 지대를 이룬다. 동쪽으로는 화개산(花開山)[381.8m]과 할미고개를 넘어 한덕이산[419.0m] 줄기 아래 내포리의 광활한 평야 지대가 펼쳐져 있다.





충주시 신니면 문숭리 숭선마을 충주 숭선사지 입구에 남아 있는 유적이다. 숭선마을 뒤쪽으로 형성된 골짜기에는 오래전부터 많은 기와편과 자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이에 따라 대규모의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1981년경 사지에서 명문 기와가 출토됨에 따라 숭선사(崇善寺)임이 확인되었다.

숭선사에 대해서는 『고려사(高麗史)』를 비롯하여 여러 사료에 기록이 전하고 있으며, 최근 발굴 조사에 의하면 숭선사는 954년(광종 5)경에 창건된 것으로 밝혀졌다. 1182년(명종 12)경 대규모 중수가 이루어졌고, 조선 후기까지 꾸준하게 법등을 이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숭선사지 당간지주도 고려시대 사찰 창건시 입구에 당간지주를 배치함으로써 사찰의 위상을 대내외에 선양하고자 하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당간지주는 통일신라 초기부터 건립되기 시작하여 고려시대에 들어와 크게 성행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많이 세워지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는 법회나 신앙 활동의 양상이 변화되면서 괘불지주가 사찰의 중심 법당 앞에 세워졌다. 숭선사는 고려 광종 대에 창건된 사찰로 충주 지역의 유력 호족이었던 충주유씨들과 깊은 관련이 있는 사찰이었다.

숭선사에서 가까운 정토사지를 비롯하여 충주 지역에는 고려시대에 들어와 많은 사찰이 창건되거나 중창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유력 사찰의 창건이나 중창시 입구에 당간지주를 세웠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가 반영되어 숭선사에도 창건시 당간지주가 사찰로 들어가는 입구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충주 숭선사지 당간지주는 숭선마을 한가운데에 숭선 마을회관 앞쪽, 충주 숭선사지로 올라가는 입구에 배치되어 있다. 당간지주의 기단부는 결실된 상태이다. 다만 지주부와 간대석의 하단부가 지면에서 70㎝ 정도 치석이 고르지 못한 것으로 보아 묻혔거나 기단부와 결구된 흔적으로 보인다. 간대석(90×65㎝)은 큰 사각형 대석(臺石)으로 별다른 조식은 없으나, 상면에 특이한 형태의 사각형 구멍을 남북으로 33㎝ 간격을 두고 2개 시공하였다. 한 변이 17㎝인 정사각형으로 깊이는 5㎝ 정도인데, 이것은 당간 하단부를 이중으로 세워 당간을 견고하게 고정하기 위한 시설로 보인다.

현재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것에 의하면 북한의 불일사지 당간지주와 동일한 간대석 수법이다. 따라서 2개의 당간지주가 비슷한 시기에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석공들에 의하여 치석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간대석 각 측면에 정으로 돌을 치석하였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정 자국으로 보아 당간지주는 지름이 2㎝ 정도인 정을 사용하여 치석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간대석의 당간 받침 시설로 보아 숭선사에는 목당간(木幢竿)이나 석당간(石幢竿)이 세워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지주부는 각 면에 별다른 조식은 없지만 규모가 커서 웅장하면서도 단순한 인상을 주고 있다. 다만 외면 외곽 모서리를 부드럽게 깎았으며, 정상부는 평평하다가 약하게 호선을 이루고 있다. 당간을 고정시키는 간(杆)은 간구(杆溝)와 간공(杆孔)을 마련하여 고정하였다. 간공(8×12㎝, 깊이 16㎝)은 지주 내면에 사각형으로 관통되지 않게 시공하였다. 간구(31×19㎝, 깊이 14㎝)는 내면 꼭대기에 ‘⊔’형으로 크게 시공하였다. 간공과 간구는 지주 규모에 비하여 작은 편이다.

현재 서쪽 지주와 간대석만 남아 있는데, 원래는 당간과 동쪽 지주도 같이 있어야 한다.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숭선마을 앞으로 신덕저수지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졌는데, 당시 동쪽 지주가 저수지 공사시 교량에 사용되어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충주 숭선사지 당간지주는 고려 전기에 건립되었지만 통일신라시대 당간지주 수법이 일부 적용되면서 웅장하고 둔중한 인상을 주고 있어 고려시대적인 치석 수법을 다분히 보이고 있다. 따라서 당간지주는 954년 숭선사가 창건되고, 가람이 대찰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간 시기에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사실은 충주 숭선사지 발굴 조사에서 출토되는 유물들과 숭선사 창건 기록이 방증하고 있다. 또한 충주 숭선사지에서 출토된 석조물들이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당간지주도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에 전체적인 가람이 조영(造營)되면서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충주 숭선사지 당간지주는 대형으로 건립되었는데, 이는 당시 숭선사가 왕실의 후원으로 건립되었으며 대규모의 사찰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충주 숭선사지 당간지주는 고려 초기 이후에 건립된 당간지주 양식의 기준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