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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면 예곡리 구교수구빈기념비(靑山面 藝谷里 具敎壽救貧紀念碑)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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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면 예곡리 구교수구빈기념비(靑山面 藝谷里 具敎壽救貧紀念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11. 11. 06:51





청산면 예곡리 하예곡에 있는 능성인 구교수(具敎壽)의 구빈기념비(救貧記念碑)입니다.

하예곡 마을회관앞에 조금 떨어진 곳에 서있습니다,하예곡은 능성구씨들의 집성촌입니다.

비석의 상태로 보아 일제 강점기 시절 흉년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을때  동네의 빈민들을 위하여 자신의 곡식과 재물로 어려운사람을 도운 공을 잊지않기 위해 세운 기념비 입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능성인구교수구빈기념비(綾城人具敎壽救貧紀念碑)라고 적혀있습니다.

좌우측으로 새겨진 구교수의 선행내용이 적혀있으며 비석 앞에는 다른 돌을 이용해 내용을 적어 놓았습니다.



능성구씨는 전라남도 화순군 능성()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시조는 고려 때 벽상삼한삼중대광검교상장군()을 지낸 구존유()이다.구존유가 중국 송()나라의 한림학사()를 지낸 주잠()의 사위로, 주잠이 1224년(고려 고종 11) 몽골의 침입을 피하여 고려로 망명할 때 동행하였다는 설이 있지만, 중국 사료에는 구존유가 고려인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구씨가 1224년 이전부터 한국의 호남 지방에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구존유와 주잠 사이에는 300년의 시간 차이가 있어 이를 연결시키기는 어렵다.구존유의 아들 구민첨()은 평장사()를 지내는 등 후손들이 고려 조정에 계속 출사하여 가문의 명성을 높였다.

6세손에 해당하는 고려 말기에서 조선 전기 사이에 판사파()·시랑중파()·좌정승파()·판안동파()·도원수파()·낭장파()·감무파(
참판파()·문천군사파() 등의 9파로 갈렸다. 그중 도원수파·판안동파·좌정승파 등 3파가 조선시대에 가장 현달하였으며, 오늘날 구씨 전체 인구의 약 80%(도원수파만 40%)를 차지하고 있다. 조선 세조 때 치관()이 영의정을 지낸 것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에 상신() 2명, 공신 9명, 부마() 3명을 배출하였다.

《능성구씨사료집》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총 562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는데, 그 가운데 진사 144명, 문과 55명, 무과 363명으로 무과 출신이 65%를 차지한다. 이를 파별로 보면 도원수파 359명, 판안동파 72명, 좌정승파 42명으로 역시 이들 3파가 전체의 84%를 차지한다. 무과 출신 가운데 영조 때까지 종2품의 장신급()이 9명이나 배출되었는데, 이는 그때까지의 장신 총수의 12분의 1에 해당한다. 그중에는 병사(使)·수사(使)를 지낸 구사직(), 훈련대장 등을 지낸 구굉(), 어영대장 구인후(), 총융사(使) 구인기(), 어영대장 구문치(), 총융사 구감(), 훈련대장 구성임(), 훈련대장 구선복()이 있으며, 구굉·구인후·구인기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에 녹훈되었다.

이밖에
공신으로 중종반정의 정국공신()인 구현휘(구수영(), 성종 때 좌리공신()에 오른 구치관(구문신() 등이 있다. 또 고려 말에 좌시중()을 지내다가 고려가 멸망하자 조선 태조가 좌정승을 제수하고 불렀으나 응하지 않은 좌정승파의 분파조 구홍(), 중종부마가 된 구사언(), 인조의 외조부이며 이조판서·좌찬성·숭록공신(祿)에 오른 구사맹(), 시문에 뛰어나고 관찰사·참판·대사헌을 지낸 구봉령() 등도 가문을 빛낸 인물들이다.

능성구씨 [綾城具氏] (두산백과)







예곡리(藝谷里)라 부르게 된 것은 “예실”이라고 부르는 옛말을 발음대로 한자를 쓴 것이다. 충정공 송시열의 친필 “예곡정사(藝谷精舍)”의 문구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예곡리는 자연마을로 윗예실과 신촌, 아랫예실 세개의 마을로 되어있다.


광산김씨(光山金氏)의 집성촌으로 호랑이 모양의 산세가 품고 있다는 마을 상예곡에는 1919년 김철수, 김인수, 김지수, 최남석 등이 중심이 되어 만세시위를 했던 나라 사랑이 남다른 충혼의 마을이기도 하다.


하예곡리는 능성구씨(陵城具氏)와 밀성박씨(密城朴氏)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예곡삼경이라하여 산세가 수려하고 보청천 맑은 물로 옥토를 이뤄 잘사는 마을이다. 또한 병자호란 때 박문강 충신을 기리는 충신비가 세워져 있다. 예곡초등학교는 1943년 4월 1일 문을 열어 1995년 3월 1일 폐교하고 그 자리에 천연염색을 하는 업체가 들어서 있다. 1955년에 설립한 천주교회 예곡공소, 1981년 개소한 예곡보건진료소가 마을의 명소이다.


마을뒤 산세가 끝나는 곳에 큰 바위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 백호바위가 있으며, 이곳에서 풍류만을 즐기고 농사일과 시주공양에 인색한 주민들을 깨우치기 위해 한 스님이 백호바위 근처에 연못을 파면 마을에 부귀영화가 찾아올 것이라는 소문을 퍼트리자 온 동네 사람들이 농사일을 전폐하고 연못을 팠다. 그 결과 그해 농사를 망쳐 초근목피로 연명할 지경이 되어서야 깨닫고 순리대로 살며 마을이 합심단결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백호바위에는 음각된 서체가 남아있고 수령 300년이 넘는 느티나무와 버드나무들이 마을의 역사를 말해주고 마을 어른들이 이곳에 모여 마을의 대소사를 논하였으나 1960년말 하천제방의 축조공사로 그 흔적이 일부 사라져 아쉽다. [옥천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