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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니면 동락리 동락전승비(新尼面 同樂里 同樂戰勝碑)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신니면 동락리 동락전승비(新尼面 同樂里 同樂戰勝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12. 2. 11:24

 

 

동락전투는 1950년 7월 4일부터 7일까지 충주시 신니면 동락리 일원에서 전개됐으며 국군 제6사단 제7연대 제3대대가 북한군 1개 연대를 섬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국군은 당시 전투에서 북한군 2천186명을 사살하고 132명을 생포했으며, 트럭 60대 등 군수품 22종 1천165점을 노획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전투 당시 노획한 소련제 장비는 유엔에 보내져 북한의 남침을 전 세계에 알리고 유엔군 파병의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기록됐다.

 

 

 

6·25 전쟁 중인 1950년 7월 4일부터 7일까지 충청북도 충주 지역 일대에서 벌어진 국군과 북한군 간의 전투를 기리는 전승비입니다..



동락리 전투는 6·25전쟁 초기 후퇴를 거듭하던 중 국군 제6사단 제7연대가 1950년 7월 4일부터 7일까지 장호원에서 음성에 이르는 무극리 감우재 동락리 일대에서 북한군 제15사단을 상대로 1개 연대 이상 규모를 궤멸시킨 전과를 올린 한국전쟁 중 국군의 첫 번째 승리를 거둔 전투이다.

 

 

 

 

 

7월 4일 9시 충주중학교를 출발한 제6사단 제7연대 제2대대(대대장 소령 김종수)는 저녁 때 신덕저수지(용원저수지)에 이르러 진지를 점령했다. 제7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음성 방어가 긴급하다고 판단하여 제1대대는 무극리로 진출시키고, 제2대대는 음성으로 이동시켜 사정고개 일대에 배치하였으며, 제3대대는 생극을 향하여 전진했다.

 

 

 

 

 

1950년 7월 7일 동락리를 통과할 무렵, 국군 7연대 제3대대장은 공격 명령을 내렸다. 제3대대 9중대는 북한군 차량대열 선두를 공격하였다. 북한군의 이동대열 첨병중대가 교전에 들어가자 국군 제3대대가 있는 310고지 정면에 적군이 밀집대형으로 정지하였다. 이에 제3대대가 북한군의 측면을 공격하자 적은 크게 당황하여 혼란에 빠졌다.

한편 7월 6일 15시 부용산을 점령하라는 연대장의 명령을 받은 제2대대는 가섭산 북쪽의 644고지를 점령했다. 7월 7일 5시경 동락리 앞 도로에 수십 대의 차량이 병력을 가득 태운 채 서 있는 것을 본 제2대대는 고지 아래로 신속히 내려가 6시에 공격을 개시했다. 기습공격을 받은 북한군은 도주했다.

 

 

 

 

 

7월 6일 북한군 제48연대는 “국군이 차를 타고 도망쳤다.”는 동락리 주민의 말을 듣고, 또 신양리까지 수색한 결과 국군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심한 듯 동락리에 진출한 야포의 엄호 아래 신양리를 경유하여 음성으로 진출하려 했다. 그래서 야음을 이용하여 주력부대가 차량으로 생극을 출발하여 7월 7일 5시경 동락리를 통과하고 있었다.

 

 

 

동락초등학교 교정에서 국군 제3대대 방향으로 사격하던 적의 야포가 제2대대 쪽으로 포구를 돌리고 있었다. 제2대대는 81㎜ 박격포 1문으로 사격을 개시하여 북한군의 포진지를 파괴하였고, 야적된 포탄상자도 연쇄 폭발시켰다. 제2대대는 북한군의 저항이 거의 없이 잔적을 소탕했다.

 

 

 

동락리전투에서 국군은 인명사살 2,186명, 포로 132명, 122㎜곡사포 6문, 76㎜박격포 18문, 구경50 기관총 6정, 중기관총 12정, 경기관총 14정, 자동소총 37정 소총 919정, 장갑차 4대, 2 1/2톤 트럭 60대, 1/4톤 짚차 15대, 사이드카 7대, 무전기 4대, 전화기 12대, 말 24필과 상당량의 탄약 등을 노획했다. 이에 비해 국군의 손실은 전사 9명, 부상 53명뿐이었다.

노획장비는 대전에서 국민에게 전시함으로써 국군의 승리를 국민에게 널리 알렸다. 노획품은 소련 제품의 표시가 있어 소련이 6·25전쟁에 개입했다는 증거로 유엔에 보내졌다. 승전 보고를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제7연대 전 장병에게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주었고 격려금 50만 원을 주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동락전투와 관련하여 항상 따라오는 인물이 김재옥(金在玉)입니다 김재옥은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활동한 교육자입니다.


김재옥은 1934년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에서 출생하였다. 음성여자중학교를 거쳐 1949년 충주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1950년 6월에 충주 동락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재직 중 한국전쟁을 맞았다. 당시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하고 계속 진격하여 7월 5일 음성군 무극리까지 점령하고 충주 방면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7월 6일 동락초등학교까지 적의 병력이 침투하고 각종 무기와 탱크가 학교 교정에 집결하자, 김재옥은 기지를 발휘하여 적군을 안심시키고 기회를 틈타, 학교에서 4㎞나 떨어져 있는 아군의 매복지까지 직접 찾아가 적의 동태를 상세히 설명하였다. 아군은 김재옥의 설명으로 정세를 판단하고, 400여 명의 적은 병력으로 기습공격을 가하여 대대적인 승전을 올렸다. 김재옥은 이후 당시 소대장이었던 이득주 소위와 결혼하여 단란한 생활을 하던 중 1963년 12월 고재봉 사건으로 가족 전원이 몰살되는 참변을 당하였다.

김재옥의 반공정신을 기리고자 1960년에 한국전쟁 당시 7연대 대대장이었던 김종수에 의하여 『전쟁과 여교사』라는 책이 출간되었으며, 이는 당시 반공교재로도 사용되었다. 『전쟁과 여교사』는 1966년에 임권택이 감독하고 김진규와 엄앵란이 주연한 「전쟁과 여교사」라는 영화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당시의 전적을 기념하는 현충탑과 행적비가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문락리 126번지[신덕로 301] 동락초등학교 교내에 세워졌다. 현충탑은 1968년에 세워졌으며, 행적비는 충주여교사협회에서 1976년 7월 2일에 건립하였다. 전승비도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대화리 산1번지에 세워졌는데, 전승비는 1973년 7월에 충북도지사가 세웠다. 또한 1990년 7월에 동락전승기념일에 맞추어 김재옥 교사 기념관이 동락초등학교 교내에 건립되었다. 김재옥 교사 기념관은 김재옥 및 한국전쟁의 순국선열에 대한 뜻을 기리는 전시물을 관람할 수 있는 전시관과 교육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충주지역의 당시 전투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국군 제 6사단 2연대는 후퇴를 거듭하다 7월 1일 충주로 들어왔다. 그리고 4일에 지역민의 소개를 명하고, 남한강 남쪽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8일 북한군 12사단은 아군의 진지에 공격을 개시하고 강을 건너 충주로 진입하여 남진을 계속하였다. 국군은 한 때 반격하여 적을 물리치기도 하였으나, 세 부족으로 남쪽의 대림산, 수회리, 수안보에서 각각 적을 저지하다가 11일에 수안보에서 이화령으로 물러났다.
한편 7월 6일, 제 6사단 7연대는 한때 무극리를 탈환하고 1대대는 북방으로 전진하다가 적의 역습을 받아 음성으로 철수하고, 3대대는 신니면 동락리 방면에서 적을 방어하다가 용원리로 후퇴하였다. 적 15사단 48연대는 장호원에서 남하하여 7일 정오에 신양리를 치고 음성으로 진출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대대는 음성에서 무극리로 진출하며 도로를 방어하고, 2대대는 우측의 644고지(부용산)를 점령하고 음성과 충주로 향하는 중앙지대에서 적의 동향에 대비하고 있었다.
2대대장 김종수 소령은 산마루에서 사방을 관측하던 중 동락초등학교 일대에 적의 연대병력이 집결하여 저녁준비를 하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는 사전에 동락학교의 김재옥교사가 적의 동태를 상세히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대대장은 자신을 갖고 각 중대에게 17시에 공격할 것을 명하고 공격지점을 정하여 은밀히 이동하였다. 아군 2대대의 병력은 400명에 미달하였으며, 화기는 81m/m 박격포 1문과 기관총 1정이며 모두 소총뿐이었다. 정각 17시에 집중사격을 가하였다. 기습을 당한 적은 우왕좌왕하면서 우리에게 일제 사격을 가해왔다. 어려운 상황에서 아군 박격포의 제1탄이 정확하게 적의 포진지 중앙에 명중하여 적의 포는 완전히 부서졌으며, 아군은 사방에서 포위하고 집중 공격하여 적을 섬멸하였다.
이 전투로 적 사살 2,186명, 포로가 132명이며, 곡사포 6문, 박격포 18문, 중소기관총32정, 자동소총 37정 소총 919정, 장갑차 4대, 트럭 60대, 지프차 15대, 사이드카 7대,말 24필 무전기 16대 등 소련제 무기들을 노획하였다. 아군의 피해는 전사 9명, 부상 53명뿐이었다. 더욱 이 싸움은 6.25이후 최초의 승리로 7연대 전 장병에게 1계급씩 특진의 영예가 주어지기도 하였다.
이 동락리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대화리에 1973년에 ‘전승비’를 세웠으며, 동락초등학교 교정에는 1976년에 김재옥 여교사의 현충탑이 세워지고, 기념관이 건립되어 당시의 상황을 알리는 교육현장으로 가꾸고 있다.[주덕읍지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