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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박물관 무덤에묻은 인형(淸州博物館 木製人形) 본문
국립청주박물관에 있는 조선시대의 명기(明器)인 목제인형입니다.
귀기(鬼器) ·가기(假器)라고도 한다. 명기란 신명(神明)의 기(器)라는 뜻으로 중국에서는 고대부터 죽은 후의 세계에서 사용할 생활용구를 사자(死者)와 함께 분묘에 넣어 매장하는 풍습이 있었다. 무덤 속에 넣기 때문에 주로 흙을 구워 만들었다. 죽은 자가 생전에 사용한 기구 ·인물 ·동물 등을 모조한 것들이다. 은(殷) ·주(周)시대의 무덤에서 출토한 청동이기(靑銅彛器)와 도기, 전국시대의 무덤에서 출토한 흑도상(黑陶像), 도질(陶質)의 솥[鼎] ·항아리[壺] ·두(豆:제사 때 쓰는 제기) 등은 모두 명기로서 만들었다. 한대(漢代)에는 명기 제작이 더욱 성행하여 크고 작은 인물의 토우를 비롯하여 개 ·돼지 ·닭 등의 동물, 가옥 ·창고 ·우물 ·솥 ·가구 ·식기 등의 모형이 제작되었다. 남북조시대의 명기는 불교의 영향을 받았으며, 수(隋) ·당(唐)나라 때에는 삼채유(三彩釉)를 사용하여 사실성이 있는 말 ·낙타 ·인물 등을 만들었다. 명기 제작은 송(宋) ·원(元)나라를 거쳐 명(明) ·청(淸)시대까지 계속되었다.
명기를 껴묻는 풍습은 한국에도 전래되어, 조선시대에는 사람 ·말 ·항아리 등의 명기를 만들었다. 고래의 풍습인 순장(殉葬) 대신 명기를 부장한다는 뜻도 있어 이것을 묻으면 죽은이의 영혼이 위로를 받는다고 믿었다. 명기를 만드는 풍습은 조선 인조 이후에는 실례를 찾아볼 수 없다. 명기 [明器] (두산백과)
이 명기(明器)는 조선시대 좌승지를 지낸 오세검(吳世儉. 1563-1611)부부묘(가덕면 삼항리)를 이장하면서 출토된 나무인형으로 생전의 부부를 모신 남녀성인과 어린노비를 조각한 거스로 추정된다.이와 같은 명기를 넣는 장례풍습은 조선시대 예법서인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의하면 "나무로 만든 수레와 말, 시종과 시녀를 만들고,각각의 봉양품을 지물로 상징하게 하며 작게 만든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조선시대 무덤을 발굴하면 매우 작은 형태의 기물들이 발견되곤 한다. 사람이 죽은 후에도 현세와 같은 생활이 계속된다고 믿는 내세적 관념이 적용돼 무덤에 함께 묻었던 기물, 명기(明器)라 불리는 유물이다.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의 무덤에 강제로 묻는 고대의 순장(旬葬)을 대체하고자 우리나라 삼국시대 무덤에는 토우, 고려 때는 각종 청자 용기 등을 묻었다. 고려시대 무덤에서 발견되는 청자가 당시 실제로 사용하던 것이었다면, 조선시대에는 실제 사용하던 기물들로 구성은 하되 크기를 매우 작게 축소시켜 새로 제작한 것들이다.
조선시대에 명기는 성리학의 도입과 함께 유교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상장례 의식이 적극적으로 수용되면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특히 왕실에서 사용한 명기는 ‘세종실록’ 중 ‘오례의’편의 흉례(凶禮) 명기조(明器條)에 기물의 종류, 재질과 함께 그림까지 그려져 있어 잘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명기가 일정한 규범에 따라 만들어지고 관리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명기에는 생활용기, 제기, 악기, 무기 등이 있고, 간혹 여성과 남성의 인물상이나 말 모양의 동물상도 있다. 재질은 도자기·와기·나무·청동 등이다.
언뜻 보면 마치 소꿉놀이에 쓰일 법할 정도로 매우 작기 때문에, 별로 품을 들이지 않고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 기물을 똑같이 재현했기에 극도로 정교할 뿐 아니라, 상당히 공을 들여 도자기를 굽기도 했다. 무엇보다 명기는 왕실이나 신분 높은 일부 지배계층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신분의 등급에 따라 무덤에 넣을 수 있는 수량도 달라진다. 15세기에 편찬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서는 4품 이상의 사대부는 30벌, 5품 이하는 20벌, 서인(庶人)은 15벌로 규정했다.
명기는 시대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조상에게 ‘예(禮)’를 다함에 있어 얼마나 정성을 쏟았는지를 알게 해준다. /이명옥 국립문화재연구소 미술문화재연구실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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