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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수읍 비상리 국계서원(內秀邑 飛上里 菊溪書院) 본문

통합청주시/청원구(淸原區)

내수읍 비상리 국계서원(內秀邑 飛上里 菊溪書院)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12. 19. 08:58



내수읍 비상리 마을입구에 있는 국계서원(菊溪書院)입니다. 

국게서원(菊溪書院)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으며 한쪽에는 모현재(慕賢齋)라는 현판도 걸려 있습니다.




국계서원은 조선 숙종27년(1701)에 청원군 북일면 국동리 국동마을에 교리 눌재 박증영(1466∼1467), 백음 변경복(1538∼1629), 관찰사 이유당 이덕수(1577∼1646), 정간공 지중추부사 농계 이수언(1636∼1679)을 봉향하고 설립한 서원으로 원생은 15명을 두었다.

 

그러나 고종 8년(1871) 사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는데, 1960년에 비중리 행정마을에 다시 세우고, 매년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에 향사하고 있다. 지금의 서원은 1960년에 중건하고, 1972년에 중수한 건물로 정면 4간, 측면 1간반 홑처마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이다.


 

내부는 마루방에 쌍문을 달고 앞마루는 놓았으며, "국계사(菊溪祠)"라는 편액을 걸었고, 앞에는 "사현문(四賢門)"이라 편액한 솟을대문을 세우고 주위에는 담장을 둘렀다. 그리고 사당 밑에 "국계서원(菊溪書院)"이라고 편액한 강당이 있다. 현재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다.



박증영(朴增榮)은 조선 전기의 학자·문신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자는 희인(希仁)이며, 호는 눌재(訥齋)이다. 규정공(糾正公) 박현(朴鉉)의 8세손으로, 눌재공파의 파조(派祖)에 해당되는 인물이다. 아버지는 박미(朴楣), 할아버지는 박중손(朴仲孫), 증조할아버지는 박절문(朴切門), 외할아버지는 강석덕(姜碩德), 처부는 박영달(朴英達)이다. 아들 박훈(朴薰)[1484~1540]은 기묘명현(己卯名賢)이다.


1483년(성종 14) 문과(文科)의 춘당대시(春塘臺試)에서 병과(丙科) 11위로 급제하였으며, 1486년의 중시(重試)에서 을과(乙科) 2위로 급제하여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그 뒤 예빈시직장(禮賓寺直長)과 홍문관교리(弘文館 校理)를 지냈는데, 시문(詩文)과 필법(筆法)으로 당대에 이름을 크게 떨쳤다.

1488년 예빈시직장으로 있을 때 허종(許琮)을 따라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을 의주(義州)의 의순관(義順館)에서 맞이하였는데 동월이 그의 시문과 필법을 보고, 시문은 두보(杜甫)[712~770]와 같고, 필법은 조맹부(趙孟頫)와 비슷하다며 감탄하였고, 우아한 성품과 단정함을 기려서 ‘희인’이라 이름하였다.

명나라의 부사 왕창(王敞)도 시에는 호연(浩然)의 기상이 있고, 글씨는 당나라 현종간의 천보서법(天寶書法)을 계승하였으며, 원나라 제일의 서예가인 조맹부의 서체를 잘 쓴다고 놀라워하였다. 성품이 강직하고 씩씩한 기질이 있었고, 매우 청렴하여 사람들이 존경하였으며, 성종(成宗)이 그를 깊이 사랑하여 용연(龍硯)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홍문관교리로 재직 중 부친상을 당했는데, 여막에서 병을 얻어 29세의 나이에 죽었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변경복(卞景福)은 조선 전기 청주지역의 효자·학자이다.


본관은 초계(草溪)이고, 자는 중신(仲申)이며, 호는 백음(栢陰)이다. 청원군 내수읍 비상리 출신이다. 세종 때 예문관제학을 지낸 변효문(卞孝文)의 4세손으로, 아버지는 변충남(卞忠男), 할아버지는 변승종(卞承宗), 증조할아버지는 변심(卞鐔)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성장하였으나 어머니를 봉양함이 지극하여 생전의 봉양과 사후의 알묘(謁廟)·봉제(奉祭)가 모두 주위의 예를 찾기 어려울 만큼 특별하였다. 일찍부터 벼슬을 멀리하고 은거할 뜻을 가지고 있었다. 음악으로써 근심을 잊고 경전 탐구에 몰두하며 덕과 의를 존중하니 원근의 선비들이 청주 신항서원의 원장으로 추대하였다. 형 변경수(卞景壽)와 함께 신항서원의 설립과 운영에 참여하여 원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5세의 나이임에도 노모(老母)를 등에 업고 피난하여 무사하였다.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선암리에 있다.



변경복(卞景福)의 행실이 옛 강혁(江革)의 효행과 같다고 조정에까지 알려져 1602년(선조 35)에 정려가 내려졌다. 정문(旌門)은 내수읍 비홍리 앞산에 세워졌고, 그 사적은 『삼강록(三綱錄)』에 등재되었다.

충청북도 청원구 내수읍 비상리에 있는 국계서원(菊溪書院)에 제향되어 있다.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표가 전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이수언은 조선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자는 미숙(美淑), 호는 농계(聾溪)·취몽헌(醉夢軒)이다. 관찰사 이동직(李東稷)의 아들이며, 이색(李穡)[1328~1396]의 후손이다.


1660년(현종 1)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669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의 벼슬을 거쳐 정언·지평을 역임하고 1681년(숙종 7)응교를 거쳐 경상도관찰사로 특진된 뒤 승지·대사간·대사헌 등을 지냈다. 1689년 기사환국 때 초산(楚山)에 유배되었다가 1694년 갑술옥사로 풀려나와 형조판서에 올랐다.

이어 대사헌으로 오도일(吳道一)을 탄핵하다가 전라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그 뒤 다시 내직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인 청주에 내려갔다. 그 뒤 예조판서를 비롯하여 판윤·참찬·지중추부사 등의 벼슬로 조정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뜻을 굽히지 않고 끝내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시호는 정간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충청북도 청원군 쌍이리 산37-13번지에 위치해 있다.
충청북도 청주의 국계사(菊溪祠)에 제향 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이유당 이덕수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자는 사로(師魯), 소자(小字)는 여숙(汝淑), 호는 이유당(怡愉堂)이다. 영의정 이유청(李惟淸)의 후손이며 이도(李濤)의 아들로 일족인 현감 이준(李浚)에게 입양되었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선대로부터 청주 북일면 상당산(上黨山)[419m] 아래에 우거(寓居)하였다.


1606년(선조 39) 진사(進士)가 되고 1608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가 검열(檢閱)이 되었다가 저작(著作)·박사(博士)를 역임하였다.

1612년(광해군 4)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이 일어나자 장인인 조수륜(趙守倫)과 함께 연루되어 이산(理山)으로 유배되었으며 1618년에 창평으로 이배되었다가 1621년에 풀려났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수용(收用)되어 전부(典簿)에 임명된 뒤 예조좌랑 겸 춘추관의 기주관과 지평을 지내고,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공조정랑으로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이 되어 인조를 공주까지 호가하였다.

1632년 부수찬으로 왕세자 가례(嘉禮)에 공이 있다 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1634년 우부승지로 있을 때 강석기(姜碩期) 등과 인조의 사친(私親)인 원종(元宗)의 입묘(入廟) 논의에 반대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연산에 귀양 갔다가 1636년에 풀려나 승지가 되었다.

이듬해 좌부승지로 관서지방에 무재(武才) 시험관으로 갔다가 병자호란을 당하여 부득이 돌아오지 못하고 영북(嶺北)으로 향하여 여러 도에 격문을 보내고 격려하다가 이듬해 돌아와 승지가 되었다. 그뒤 이조·형조의 참의와 여러 차례의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호란 후 청나라의 갖은 횡포가 심하자, 표면상으로 그들을 위문한다는 명목으로 적진에 들어가 적정을 살피고 돌아왔다.

1641년 한때 강원감사로 나갔다 돌아와 이조참의로 있다가 1645년 죽었다.

지금은 없어졌으나 상당구 주성동에 있는 이덕수가 세운 이유당(怡愉堂)이란 정자가 있었다 한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고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비중리의 국계사(菊溪祠)에 제향되어 있다.


묘소는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묵방리 뒤 구룡산(九龍山)[163.6m] 노적봉에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