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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강면 부강리 김학현고가(芙江面 芙江里 金學賢古家) 본문

전국방방곡곡/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부강리 김학현고가(芙江面 芙江里 金學賢古家)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7. 2. 6. 17:51

 

 

일제강점기 시절 부강의 부호였던 김학현의 고가(古家)입니다.

지금은 그의 후손에 의하여 음식접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속건물이였던 별관은 부강성당의 부속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부강리고가(김학현고가)는 부강지역에 대부호였던 김학현이 거주하였던 고가로 1920년대에 건축되였으며 현재는 살림집과 식당으로 이용되면서 처음 지었을때와 비교하면 많이 변형되였으나 옛스러운 한옥건축의 멋은 잘 남아있다.

현존하는 건물을 중심으로 집의 구조를 살펴보면 ㅡ자형의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곳간채가 남아있다

안채는 팔작지붕형태의 목조기와집으로 총건축면적은 184.78제곱미터이며 정면 두칸의 대칭을 중심으로 좌주측의 온돌방과 부억으로 아루어져있다.

지금은 개조된 대문간채 좌우의 사랑채와 곳간체가 식당으로 이용되고 있다. 가옥의 우측에 있는 별당채 한옥은 현재 부강성당에서 사용하고 있다.

 

 

 

 

 

김학현은 부강에서 이름난 재력가로 많은 흔적이 주위에 남아있다.동아일보에 의하는 기사가 다음과 같다.

충북 청주군 부용면 유지 제씨는 한재 이래 기근에 헤매는 동포에게 아래와 같은 동정금을 주었다고 한다. 김학연 1백20원, 김원복·전서봉·우덕삼·곽흥원·이태현·박노태 각 30원. 소계 4백원.'-<동아일보 1930년 3월 2일자>

인용문을 보면 김학현 씨가 전체 기부자 7명 중 액수가 가장 크다. 이같은 모습은 다음 기사로도 이어져, 그가 또다시 기부액 전체 1위를 차지한다. 이때가 김학현 씨의 인생 전성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충북 청주군 부용면 부강공립보통학교 학부형회에서는 지난 17일 추기 대운동 끝에 간부 제씨의 발기로 다음가 같은 거액을 각각 연출하여 기본금을 만드는 동시에 사백여명 학부형들도 다소 낼터이라고 한다. ▲김학현 1천1백원 ▲전서봉 1천원 ▲확흥원 2백원 ▲윤성길 1백원 ▲계2천3백30원.'-<동아일보 1930년 10월 23일자>

지금은 사라졌지만 70년대까지만 해도 운동회 때 기부금을 받았고, 그 기부금 명단을 금줄의 고추처럼 천막 밑으로 내걸기도 했다.

 

 

 

 청원군 무성리에 있는 영조태실과 그 밑에 있는 재실인 성모재에도 김학현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영조 태실터는 청원 부강의 한 부호에 의해 매입됐고, 그는 일대의 만석꾼으로 이름난 김학현이었다. 그는 연기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금강에서 소금배를 운영하며 많은 돈을 벌었다.

그는 선친의 묘자리를 좋은 자리에 모시는 것을 미덕으로 알았고, 또 대대손손 후광을 얻는다는 속신을 믿고 영조 태실터를 매입했다. 이에 마을 주민들이 상여가 들어오던 날 힘을 합쳐 저지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자 김학현은 건장한 남자 50명을 상여꾼으로 사서 무성리 마을로 돌아왔고, 결국 영조 태실터가 있는 태봉산 정상에 일반인 묘가 들어서게 됐다.
이후 김학현은 마을 주민들이 조부모 묘를 파묘할 것을 걱정, 성모재(誠慕齋)라는 건물을 건립했다. 재실은 평지에 위치하는 것이 보통이나 재실 용도를 겸한 성모재는 고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마을주민들의 동태를 살피려는 의도도 함께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지고 있다.

 

 

 



현존하고 있는 성모재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집으로 용마루에 멧돼지 모양의 잡상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풍벽에는 흰 바탕 위에 포도 무늬가 새겨져 있다. 풍벽은 달리 바람벽(風壁)이라고 한다.

민묘가 들어선 후 마을 주민들은 영조 가봉비(加封碑)를 마을로 옮겨 보호했다. 반대로 김학현의 집안에서는 불행이 꼬리를 물었다. 그의 친아들은 6.25 때 보도연맹으로 몰려 사망했고, 손자는 아들 없이 딸만 두면서 절손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