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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이면 비산리 탁영선탑(蘇伊面 碑山里 濯纓仙榻)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음성군(陰城郡)

소이면 비산리 탁영선탑(蘇伊面 碑山里 濯纓仙榻)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7. 3. 14. 07:09



이자는 음애동계곡에 ‘탁영선탑(濯纓仙榻)’이라는 글씨를 새겨놓았다. 탁영선탑이란 ‘갓끈을 씻는 신선의 걸상’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지금의 음애동계곡은 사람들의 왕래가 있었는지 작은 돌탑들이 반갑게 맞아준다.

이 곳 음애동계곡에는 조선중기의 문신이였던 이자(李耔)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자는 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으로 유배된 문신이다.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차야(次野), 호는 음애(陰崖)·몽옹(夢翁)·계옹(溪翁)·풍림거사(楓林居士). 이색(李穡)의 후손이며, 참판 이형증(李亨增)의 손자로, 대사간 이예견(李禮堅)의 아들이다. 부인은 인천채씨로 채수(蔡壽)의 딸이다.

1504년(연산군 10) 식년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이후 사헌부감찰에 제수되어, 천추사(千秋使)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와 이조좌랑, 의성현령을 거쳐, 1506년(중종 1) 문의현령, 1509년 양천현감, 홍문관수찬, 경연검토관, 교리에 올랐다.

부친상을 당하고 경기도 용인시 기곡리에서 살면서 ‘풍림거사(楓林居士)’로 자호하였다. 1513년 복직하여 훈련원첨정 자격으로 소릉 폐출에 대한 상소를 올렸다. 1516년 사유(師儒)에 간택되어 부응교가 되었고 1517년 전한, 직제학에 올라 정난공신 녹훈에 대하여 상소하였다. 이후 부제학, 우승지, 좌승지, 도승지, 대사헌을 거쳐 주청부사(奏請副使)로 북경에 갔다.

1519년 예조참판, 한성부판윤겸동지경연사, 형조판서겸오위도총부도총관, 의정부우참찬겸지춘추관사가 되었는데, 11월 15일에 기묘사화가 발생하여 조광조(趙光祖), 김정(金淨) 등과 하옥되었다. 그러나 남곤이 구명하여 이자는 파직된 후 충청북도 음성군으로 유배되어 목숨을 건졌다. 이자는 1533년 12월 15일 직첩을 돌려받지 못하고 54세로 죽었다.

이자는 주계군(朱溪君) 문하에서 수학했는데, 학문이 깊고 효성과 우애가 돈독했으며, 말이 온화하고 꾸밈이 없었다. 14세 때 강원도 삼척 두타산 중대사(中臺寺)에서 공부하고, 1501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는데, 김안국, 정충량, 성세창, 유운 등과 동방이다. 주청부사 시절 주청사 남곤이 병을 얻어 죽게 되었을 때, 이자가 극진히 간호하여 살았으므로 남곤이 그 은혜를 갚고자 기묘사화가 일어났을 때 이자를 돌봐 유배형으로 낮추어 주었다.

이자의 처가인 충청북도 음성군으로 유배되어 그늘진 언덕에 집을 짓고 그곳을 음애동(陰崖洞)이라 불렀다. 일암(釰岩)바위 위에 초은정(招隱亭)을 짓고, 바위에다 ‘탁영선탑,음애동(濯纓仙榻,陰崖洞)’이라는 각자를 새겨 놓았다. 1529년에 다시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평곡리 토계울로 옮겨 몽암정사(夢庵精舍)를 짓고 호를 몽옹, 계옹이라 하였다. 이연경(李延慶)이 충청북도 충주시 수주팔봉에 유배 중이어서 배를 타고 서로 왕래하였다고 한다.

저서로 『음애일기(陰崖日記)』와 『음애집(陰崖集)』이 있다.묘소가 경기도 용인시 기곡리에 있다.

죽은 지 6년 만인 1538년(중종 33) 4월에 직첩을 돌려받고, 1611년(광해군 3) 한산 문헌서원에 배향하였다. 1582년 충청북도 충주시 수주팔봉에 팔봉서원을 세워 1672년 3월 27일 사액을 받아 팔봉서원(八峯書院)이라 편액하고 이자에게 유제(諭祭)의 글을 내렸다. 이때 문의(文懿)라는 시호를 추증했다. 1745년(영조 21) 종계 변무한 공훈으로 부조묘(不祧廟)를 내렸다. 노수신(盧守愼)이 행장을 찬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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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산리는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에 속하는 행정리이다.

비석동(碑石洞)의 ‘비’자와 돈산리(敦山里)의 ‘산’자를 따서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
본래 충주군 사이포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비석동·조도리·돈산리를 병합하여 음성군 소이면에 편입되었다.

돌뫼 동쪽에는 절바우가 있는 절바우산(일명 뽀족산)이 있고 마타산 서쪽에는 가섭산[710m]의 줄기인 기운들산이 있다. 새말에서 돌미로 가는 곳의 모래재고개(사현 또는 사토현), 비선거리에서 음성읍 석인리로 가는 곳의 작은고개, 비선거리에서 석인리 원충이로 가는 곳의 큰고개 등이 있다. 비산천은 가섭산에서 발원한 한벌천 하류의 소이면 비산리 앞을 흐르는 하천으로 방죽안천·장자천·버들천 등의 소하천이 유입되고 있다. 또 하나의 비산천은 비산리 오랫말에서 발원하여 돌미를 거쳐 주덕으로 흐르고 있는데 오돌천·돌미천 등의 소하천이 유입되고 있다.

소이면의 북서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2007년 9월 기준 면적은 6.93㎢이며, 2011년 8월 31일 현재 총 225세대에 501명(남자 252명, 여자 249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으로 돈산리가 충주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충도리, 서쪽은 한벌리, 북쪽은 충주시 신니면과 각각 접하고 있다. 경지 면적은 밭이 0.48㎢, 논이 0.55㎢ 등이다.주민의 대부분이 벼농사를 위주로 하고 있으나 젖소 사육과 시설 원예 농업 등을 하여 소득을 올리고 있다. 특히 비산1리와 비산3리에서는 사과도 많이 생산하고 있으며, 돌뫼에는 1930년대에 금광이 있었다. 마을 시설로는 비선거리에 1975년에 건립된 마을회관이, 오랫말에는 1978년에 건립된 마을회관이, 돌뫼에는 1982년에 건립된 마을회관이 있다. 주요 기업체로는 의류를 생산하는 우운실업(주), 영세 규모의 타일을 생산하는 (주)이비젼코리아, 스텐리스 파이프를 생산하는 (주)일진금속 등의 제조업체가 있다.

농촌진흥청에서는 실험실, 데이터 분석실, 회의실 등을 갖춘 지하 1층, 지상 3층의 연 면적 3,100㎡의 연구동을 신축하여 2007년 10월 16일에 농촌진흥청 작물과학원 인삼약초연구소를 개소하였는데, 인삼과 약초에 관한 시험·연구, 신품종 육성, 자생식물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자연 마을로는 비산1리에 비석(비석동·비선거리), 방죽안, 주막, 비산2리에 음촌(음달말), 오래말(오랫말·조도리), 비산3리에 돌뫼(돌미·돈산), 주막걸이, 비산4리에 새말(신촌) 등이 있다.문화 유적으로는 민속광장과 민속박물관이 있고 마을 북동쪽 뒷산 아래에는 미타사(彌陀寺)가 있으며, 미타사 입구에는 고려 중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미타사 마애여래불상(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0호)이 있다. 비선거리 서북쪽에 있는 방죽안 서쪽의 음애동(陰崖洞)은 조선 중종 때 좌참찬 이자(李耔)가 기묘사화로 파직되어 이곳에 살면서 골짜기의 암반석에 재실을 짓고 수업을 하였다고 한다.






음애집은1754년에 간행된 조선 전기 문신 이자(李耔)의 시문집.


6대손 이도흥(李道興)과 족종손(族從孫) 영남백(嶺南伯) 이이장(李彝章)이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유고(遺稿)를 수록하고 제가(諸家)의 문집(文集), 야승(野乘), 패설(稗說) 및 『인가고첩(人家古帖)』, 『충재일록(冲齋日錄)』 등에서 채록하여 4권 2책으로 편집하고, 새로 편집한 연보를 합하여 1754년(영조 30)에 간행하였다.


연보(年譜), 총목(總目), 본집(本集) 4권 합 2책으로 되어 있다. 권1은 시(詩), 권2는 문(文), 권3은 일록(日錄)·잡저(雜著), 권4는 부록(附錄)이다. 각 권 앞에는 목록이 첨부되어 있다. 책머리에는 1754년에 쓴 김재로(金在魯)[1682~1759]의 서문과 6대손 이도흥이 편차한 연보가 있으며, 이어 총목이 실려 있다. 연보는 구본(舊本)이 있었으나 소략(疏略)하여 이도흥이 제가의 문집과 야승 등에서 채록하여 편집하였고, 구본이 부록되어 있다.

권1에는 시와 부(賦) 2편이 실려 있다. 시는 시체별로 오언절구 3제, 오언율시 20제, 오언배율 3제, 오언고시 43제, 칠언절구 27제, 칠언율시 16제, 칠언고시 3제가 실려 있다. 부는 「유해부(遊海賦)」, 「왕패부(王覇賦)」 2수가 실려 있다. 그 중 「유해부」는 1506년에 당포만호(唐浦萬戶)인 형 이우(李耦)를 문안하고 바다를 건너며 읊은 것이다.

권2는 문(文)으로서 책(策) 1편, 소(疏) 4편, 서계(書契) 1편, 서(書) 4편, 기(記) 3편, 발(跋) 2편, 잠(箴) 1편, 상량문(上樑文) 2편, 비문(碑文) 1편이 실려 있다. 이 중 「청환삭유자광익대훈록소(請還削柳子光翊戴勳錄疏)」는 1513년 11월에 홍문관 동료와 같이 유자광의 죄를 논하고 익대훈록(翊戴勳錄)을 삭제하기를 소청(疏請)하는 내용이다.

간신 유자광이 현신(賢臣)을 무함하여 해하고 간신들과 부화뇌동(附和雷同)하여 임금을 속이고 국권을 농락한 죄를 통렬히 비난하고 있다. 옥사를 일으켜 현신을 해한 대가로 얻은 익대공신(翊戴功臣)의 위호를 삭탈해야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여유종룡서(與柳從龍書)」는 복상중(服喪中)이던 1512년 12월에 유운(柳雲)에게 보낸 것으로 소릉사(昭陵事)를 논한 편지이다. 「선판기(船板記)」는 1531년에 충주 토계(兎溪)에 있는 몽암(夢庵)이 작아 주에서 패선(敗船)을 빌려 조금 고쳐서 안식처로 삼고 그 선판(船板)에 쓴 것이다.

발(跋)은 「발인재유고(跋麟齋遺稿)」와 「발상우당시(跋尙友堂詩)」인데 「발인재유고」는 기묘사화(己卯士禍) 후에 용인의 사암(思庵)에서 고조의 유고를 편차(編次)하고 쓴 발이고, 「발상우당시」는 상우당(尙友堂) 허종(許琮)의 시집에 쓴 발이다. 상량문은 「사암상량문(思庵上樑文)」과 「몽암상량문(夢庵上樑文)」인데 「사암상량문」은 1516년 용인의 부친 묘에서 재숙(齋宿)하기 위해 지은 사암의 상량문이고, 「몽암상량문」은 충주 토계에 지은 몽암의 상량문이다.

권3은 일록(日錄)과 잡저(雜著)로 되어 있다. 일록은 1509년(중종 4) 윤9월에 시작하여 1516년(중종 11) 12월에 마쳤는데 시정(時政)의 득실과 인물의 현사(賢邪), 천재시변(天災時變) 등을 기록한 것이다. 중간에 신미(辛未)·임신(壬申) 연간과 을해(乙亥)·병자(丙子) 연간의 기록이 없는 것은 저자가 복상중이었기 때문이다.

잡저는 「우견안포초소록병서편말(偶見安圃樵所錄並書篇末)」, 「관서봉사록(關西奉使錄)」, 「서일록말(書日錄末)」, 「자서(自敍)」, 「기갑자사화(記甲子士禍)」, 「기권달수피화사(記權達手被禍事)」의 6편이다. 이 중 「관서봉사록」은 1510년에 명을 받들고 평안도에 가서 용천인들이 강을 건너 사냥하다가 탕참(湯站)에 갇힌 일을 교섭하여 처리하였을 때의 기록이며, 「자서」는 자찬행장(自撰行狀)이다.

이 일록과 잡저 6편 가운데 「우견안포초소록병서편말」, 「서일록말」, 「자서」 및 권2의 「청환삭유자광익대훈록소」, 「여유종룡서」, 「발상우당시」는 『대동야승(大東野乘)』권6에 수록된 「음애일기(陰崖日記)」에도 실려 있는데 약간의 차이가 있다.

권4는 부록으로 「행장(行狀)」(盧守愼 撰), 「묘갈음기」(族孫 李海昌 撰)와 저자가 향사된 팔봉서원, 문헌서원에 관한 기록과 「언행척록(言行摭錄)」, 「시장(諡狀)」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언행척록」은 『기묘록(己卯錄)』, 『충재일록(冲齋日錄)』,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형 「이운 묘지명」(金安國 撰), 「권벌행장」(李滉 撰) 등에서 저자와 관계있는 기록을 뽑아 집록한 것이며, 「시장」은 김정(金淨)·이우(李堣)·김안국(金安國) 등의 글 중 저자와 관계있는 시를 모으고 김안국이 지은 저자의 부친과 부인 채씨의 만시(輓詩)를 모은 것이다. 책 말미에는 1746년에 쓴 권만(權萬)의 발이 실려 있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