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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간면 금계리 고백당(黃澗面 金溪里 孤栢堂)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영동군(永同郡)

황간면 금계리 고백당(黃澗面 金溪里 孤栢堂)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7. 6. 1. 14:44





고백당(孤栢堂)이 위치하고 있는 금계리(金溪里)는 동쪽으로는 높은 산지가 이어져 있다. 백화산맥과 주행봉이 있다. 이 지역에는 금상천이 흐르며 경부고속도로가 통과하고 경부고속도로 영동인터체인지가 있다. 자연마을에는 금계마을, 죽전(대밭말), 수석이 있다. 금계마을은 마을 앞을 흐르는 하천에 빛을 비추면 금빛이 난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죽전은 대나무밭이 있어서 예부터 대밭마라고 불렀으며 한문으로 죽전이 되었다. 수석은 과거 수석리였다가 금계리에 통합되면서 그러한 이름이 붙은 것이다.



16세기 초엽 기묘사화로 인해 중종때 벼슬을 버리고, 이곳 백화산 기슭에 은거하면서 후학을 지도하였으니, 이름은 이우인, 자는 사중, 호는 농헌으로 본관은 경주 이씨이다. 그는 이곳에서 후학을 지도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는데 그곳을 고백당이라 하고 현판은 미수 허목이 지었다.

건물은 3칸에 팔작지붕이다.



경주이씨 본관 연혁

경주(慶州)는 경상북도 남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기원전 57년에 6촌(六村)이 연합하여 고대국가를 형성, 국호를 서라벌(徐羅伐)·사로(斯盧)·사라(斯羅)로 하고, 수도를 금성(金城)이라 하였다. 65년(신라 탈해왕 9) 시림(始林)에서 김씨 시조가 탄생하여 국호를 계림(鷄林)으로 칭하기도 하였으나, 별칭으로 사용하였다. 307년(기림왕 10)에 최초로 국호를 신라(新羅)로 하였다. 935년(고려 태조 18)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왕건에 항복하자 경주로 개칭하고 식읍을 주었고, 그를 사심관으로 삼았다. 비로소 처음으로 경주라는 명칭이 생겼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개칭하고 유수(留守)를 두어 영동도(嶺東道)에 속하게 하였다. 1008년(목종 11) 때 낙랑군(樂浪郡)이라 별칭하다가 1030년(현종 21) 삼경(三京)의 제도가 실시되자 동경(東京)을 설치하고 충렬왕 때 계림부(鷄林府)로 개편하였다.

1202년(신종 5) 경주 야별초의 반란으로 지경주사(知慶州事)로 강등되었다가 1219년(고종 6) 동경으로 환원되었다. 1413년(태종 13) 계림부를 경주부로 개칭한 이후 1415년 병마절도사영을 두었다가 1417년 울산으로 이전하였다. 1637년(인조 15)에 속현인 자인현이 분리 독립하였다. 1895년(고종 32) 군면 폐합으로 경주군이 되었고, 1955년 경주읍과 내동면 전역, 천북면과 내남면 일부가 통합되어 경주시로 승격했으며, 경주군은 월성군으로 개칭되었다. 1989년에는 월성군이 경주군으로 개칭되었다. 1955년에는 경주군과 통합하여 시로 승격하였다.


성씨의 역사

경주이씨(慶州李氏) 시조는 이알평(李謁平)으로 신라의 좌명공신(佐命功臣)이었다. 경주이씨 대종보(大宗譜) 상계편에 박혁거세(朴赫居世) 때 아찬(阿粲)에 올랐고, 32년(유리왕 9) 양산촌(楊山村) 이씨(李氏)로 사성(賜姓) 받았다고 한다. 536년(법흥왕 23)에 문선공(文宣公)으로 시호(諡號)를 받았고 656년(무열왕 3)에 은열왕(恩烈王)으로 추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계대(繼代)를 실전하여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묘지(墓誌)를 쓸 때 원대손(遠代孫)인, 신라 때 소판(蘇判) 벼슬을 지낸 이거명(李居明) 이후의 세계를 적은 것이 연유가 되어 그가 중조(中祖)가 되었다.

우리나라 이씨는 중국에서 귀화한 몇몇을 제외하면 거의 경주이씨 이알평의 후손에서 분관한 것이다. 이알평의 후손에서 이개(李開)의 합천이씨(陜川李氏)와 이위(李渭)의 차성이씨(車城李氏)가 갈라졌다. 중조인 이거명의 후손에서는 증손 이윤장(李潤張)의 후손이 평창이씨(平昌李氏)로, 아우인 이윤원(李潤遠)의 후손이 가평이씨(加平李氏)로, 5세손 이주좌(李周佐)의 후손이 아산이씨(牙山李氏)로, 6세손 이우칭(李禹偁)의 후손이 재령이씨(載寧李氏)로, 이양식(李陽植)이 우계이씨(羽溪李氏)로, 17세손 이영행(李永倖)이 진주이씨(晉州李氏)로, 22세손 이반계(李攀桂)의 후손이 원주이씨(原州李氏)로 나뉘었다.



충청북도 영동군의 북부에 위치한 면이다. 금강 수계인 초강이 삼도봉에서 발원하여 면의 중앙을 관류하여 심천면 초강리에서 금강 본류와 합류한다. 하천 유역 곳곳에 소규모 산간 분지가 형성되어 있다. 면 중앙을 경부고속도로와 경부선 철도가 관통하여 추풍령으로 이어져, 과거 한강 및 금강 유역과 낙동강 유역을 연결하는 요충지의 역할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 남성리 · 신흥리 · 마산리 · 소계리 · 난곡리 · 우매리 · 원촌리 등 14개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황간과 관련된 지명은 『삼국사기지리지』(상주 영동군
)에 "황간현은 본시 소라현()인데 경덕왕이 (황간으로)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 일컫는다."라는 관련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본래 신라의 소라현인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영동군의 영현()을 삼았고, (중략) 본조 태종 14년 갑오에 청산에 합쳐서 황청()으로 고쳤다가, 병신에 다시 갈라서 황간 현감을 두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조선 초기 한때 '황청'으로도 불리었음을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황간의 일명으로 소라 · 황계 · 황청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동일 문헌에 "본조 태종 13년에 본도에 예속시켰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이관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 황간현은 『동국여지지』에 3개 면을 관장한다고 기록되었다가 『여지도서』에 읍내면() · 서면(西) · 오곡면() · 매하면() · 상촌면
() · 외남면()의 6개 면을, 『호구총수』에는 읍내면 · 서면 · 오곡면() · 상촌면 · 매하면 · 남면()의 6면 110리를 관할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이 두 문헌의 간행 사이에 오곡면의 '오()'가 '오()'로 바뀌었으며, 외남면은 남면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면은 조선 시대에 군내면(읍내면)과 서면 지역이었다. 『여지도서』에 읍내면은 통천리() · 교촌리() · 애교리() 등 9개 리를 관할하였고, 서면은 서송원리(西) · 노근리() · 금계리() · 소천리() 등 10개 리를 관할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함께 각 동리마다 관문으로부터의 방향과 거리, 편호, 남녀 인구가 기록되어 있다. 이 밖에 『해동지도』에 읍내면 · 서면이, 『동여도』에 현내면 · 서면이, 『1872년지방지도』에 현내면 · 현내장시() · 서면이 기록되어 있다. 『신구대조』를 통해 볼 때 1914년 황간군 군내면을 포함하여 서면의 18개 리와 군동면의 상가리 일부를 병합하여 황간면이라 명명하고 14개 리로 새롭게 개편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947년에는 백자전리가 용산면에 편입되었고, 1989년에는 매곡면 광평리를 편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황간면 [黃澗面, Hwanggan-myeon] (한국지명유래집 충청편 지명, 2010. 2., 국토지리정보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