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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강면 금호리 보만정(芙江面 黔湖里 保晩亭) 본문

전국방방곡곡/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금호리 보만정(芙江面 黔湖里 保晩亭)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7. 6. 8. 12:31



보만정은 현종 10년(1669) 9월 조선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동춘당 송준길(1606~1672)이 64세 때에 학문을 연구하며 여생을 마치기에 좋은 곳이라 하여 검담에 세운 정자이다. 보만정 앞 금강의 푸른 물줄기와 강 건너의 앞산[부용산]과 절벽의 경치가 좋으니 이곳에서 도학을 강론하며 만년을 지낼 생각이었던 것이다. 정자의 명칭인 ‘보만(保晩)’은 늙어가면서도 자기의 행실을 깨끗히 지켜나가고 옳은 길로 나가야 한다는 뜻에서 지은 것이다. 송준길이 보만정을 세우게 된 연유에 대해서는 그의 문집인『동춘당집』에 자세하다.



금호리는 조선시대에는 문의군(文義郡) 삼도면(三道面) 검담리(黔潭里)에 속하였다. ‘검담(黔潭)’이란 지명은 마을 앞 금강에 있는 ‘검소(黔沼)’라는 소(沼)의 명칭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검소’는 ‘물빛이 검은 소’ 또는 ‘큰 소’로 해석된다. ‘소(沼)’를 ‘담(潭)’, ‘호(湖)’로 바꾸어 ‘검담(黔潭)’, ‘검호(黔湖)’로 부르기도 한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직전에는 상검리(上檢里)․하검리(下檢里)․자운리(自雲里)․원촌(院村)으로 분리되었다. 1914년에는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 정책에 따라 다시 마을을 병합하여 금호리(黔湖里)라 명명하고 부용면에 편입하였다. 금호리는 현재 1, 2, 3리로 분구되어 있다.

금호리 2구의 자연마을로는 선말, 안골이 있다. 선말은『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는 ‘원촌(院村)/서원말’로 기록되어 있다. ‘선말’은 ‘서원말(書院-)’의 준말로 서원은 검담서원을 말한다. 이 마을은 다시 강변에 자리한 ‘아랫말’과 위쪽에 자리한 ‘웃말’로 나뉜다. 안골은 선말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의 대부분은 부용지방산업단지가 차지하고 있다. 보만정에서 금강쪽을 바라보면 작은 육각정이 있는데 이곳이 ‘선말나루’이다. 금강 너머는 충남 연기군 금남면 부용리 ‘새오개’마을로 이 나루는 선말과 새오개를 오고가는 나루였다. 1970년대까지 나루를 이용하여 금강을 건넜다고 한다.

송준길은 보만정을 지은 이듬해인 1670년 친분인 두터웠던 송곡 조복양(1609~1671)에게 아래와 같은 편지로 정자의 위치와 주변 경치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정자(亭子)는  문의현 서쪽 형강(荊江) 아래, 금강(錦江)과 독락강(獨樂江), 합강(合江)의 위에 위치하여 청산(靑山)이 뒤에 있고, 큰 강이 뜰 아래로 흐르는데 세 개의 절벽이 서로 마주 보고 서 있습니다. 시야(視野)는 수십 리이고 물이 굽이쳐 싸고 흐릅니다. 토정 이지함 선생이 소금을 팔려고 장막을 펼쳤던 곳으로 선생이 일찍이 ‘삼남제일강산(三南第一江山)’이라고 칭찬했던 곳입니다.


세월이 변하여 주변 환경이 많이 바뀌고 변하였지만 지금도 보만정 주변의 경치는 변하지 않은 것 같다. 또한 보만정에서 강의 맞은편을 바라보면 벼랑 위에 정자가 있어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벼랑은 마을의 이름을 따 ‘선말벼랑’이라 부르며, 정자의 이름은 ‘금락정(錦樂亭)’으로 2002년 금남면에서 건축한 것이다. 이곳 금락정에 올라서면 정면으로는 강 건너 보만정을 아주 잘 볼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금호리를 굽이쳐 도는 금강의 아름다운 광경을 만끽할 수 있다. 필자가 이곳을 찾았을 때는 강변에 백로 4~5마리가 유유히 노닐고 있어 운치를 더해주었다. 더욱이 금락정을 지나는 부용리 지방도에는 약4km에 걸쳐 벚꽃나무가 식재되어 있어 봄에 보만정을 찾아간다면 눈앞으로 10리에 걸친 꽃길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호사를 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보만정중수기(保晩亭重修記)」경술(庚戌) - 1969년, 11대손 조빈(朝彬) 근지(謹識)

사람이 천지 사이에 나서 가장 만물 중에 신령스러운 것이니 땅은 사람을 기다려 그 이름이 나고 사람은 땅을 얻어 그 뜻을 이루나니 현인, 훌륭한 선비가 아니면 능히 형승(形勝)의 아름다움이 드러나지 못하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이 없으면 능히 내가 주거할 자리의 마땅함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크게 볼 것 같으면 도시와 관애(關隘)요, 적게 말할 것 같으면 누대(樓臺)와 사찰이 다 이로 말미암아 된 것이다.

형강(荊江)의 위에 검담촌(黔潭村)에 보만정(保晩亭)이 있으니 우리 선조 동춘당 선생이 세운 바이다. 선조는 도덕과 학문으로서 가깝게는 우계․율곡의 학파에 연유되고, 멀게는 공자․맹자의 연원에 접하여 광풍제월(光風霽月)의 성품을 타고나시고 태산북두(泰山北斗)의 우러러봄을 지니시고 임금의 스승[賓師 ; 經筵官]의 지위에 처하여 불행히 병자(丙子)․정축(丁丑)의 변[병자호란]을 만나 정통을 높이고 ?缺岵? 물리칠 뜻을 품으시고 영릉(寧陵 ; 孝宗)의 시대에 임금과 친밀한 관계를 얻어 거의 맑은 시대를 기대했었는데 현종께서 보위에 오르시고 북벌(北伐)을 중단하시니 은퇴할 뜻이 더욱 간절하여 이 강산[黔潭村]을 점거하고 이 산수 사이의 자연에 돌아와서 거닐며 여년(餘年 ; 남은 여생)을 마치시었다. 후인들이 강한(江漢 ; 先賢)의 사모하는 생각을 이기지 못하여 검담서원을 세웠다. 고종 초에 이르러 조정의 명령으로서 서원이 훼철되고[1871], 다만 선조의 외현손(外玄孫) 미호 김선생이 찬술한 묘정비만 있어 정자[보만정] 앞에 우뚝 서있다. 선조의 학행과 출처는 비에 자세히 실렸은 즉 불초 후손이 어찌 감히 더 할 말이 있겠는가?

정자가 그 구조는 남아있어도 300여 년의 긴 세월을 거치는 동안 비바람에 황폐되고 퇴락하였다. 그 아래 지나는 자들이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하니 어찌 정자[보만정]의 중수를 가히 늦출 수가 있으랴?

여러 고을 사림들이 관가[충북도청]에 청하여 그 예산을 얻고 그 역사를 보조받아 썩은 것을 바꾸고 떨어진 것을 보완하여 당우(堂宇)가 거듭 새롭게 되어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그 역사를 주관한 자는 송경수(宋景洙 ; 당시 충북도청 회계과장)이요, 그 일을 도운 자는 후손 종복(鍾福), 만빈(萬彬), 좌빈(佐彬)이다. 역사가 끝나매 나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검담의 좋은 경치를 보노라면 금강은 펀펀하고 부용산(芙蓉山)은 높고 높아 서로 앞에 물은 흐르고 산은 솟아 있다. 화창한 봄에 경치는 아름답고 장맛비가 새로 개이니 낙화는 붉은 비단을 햇빛 아래에 소이며, 동풍이 잠깐 움직이니 나르는 버들 솜이 흰 눈을 뱃머리에 나부끼니 한 폭의 그림 병풍을 편 것 같다. 솔개는 나르고 물고기는 뛰며, 꾀꼬리는 노래하고 나비는 춤을 추니, 다 그 중에 즐거운 것이 정말 이태백(李太白)의 이른바 “따스한 봄날에 안개 낀 아름다운 경치로 나른 부른다”고 하겠다.

내가 문장이 아닌데 호탕한 흥취가 스스로 발동하여 술을 부르고 물고기를 지지고 한 잔 마시고 한 수 읊으니 시의 마음이 묘하게 들어오고 취기가 점점 높아진다. 어부의 한 피리 소리에 비로소 날이 저문 것을 알고 저녁노을은 푸른빛이 떠오르고 지는 해는 붉은 빛을 토하여 석벽에 황홀하게 점을 찍은 듯 하고 강물은 돌 머리에 흘러 부딪쳐 비바람이 어지러이 우는 듯 하고 산 그림자는 강 가운데에 잠기어 초목이 거꾸로 선 듯 하더니 조금 있다가 명월(明月)이 공중에 솟아 푸른 물결에 반사되어 비치니 뜬 빛에 금이 뛰는 듯 하고 고요한 그림자에 구슬이 차가운 듯 하다.[달을 구슬에 비유한 것] 난간에 날리는 눈발은 차가운 것은 한없이 넓은 물?璲? 생기고, 처마에 들어오는 안개는 그림을 10리의 산 형태를 더해준다. 하루의 경치가 각각 가른데 형기(形氣 ; 자기 몸 형체)의 구속을 알지 못하면 선조의 즐기심에 응하여 합해지고 땅의 영기도 더욱 지금까지 온전히 내려왔다.

기유(己酉 ; 1669)년에 비로소 창건하고 또한 기유(己酉 ; 1969)년에 중수하니 우연히 천시(天時 ; 하늘의 이치)와 인사(人事 ; 사람의 일)가 기(奇 ; 홀수)와 우(遇 ; 짝수)의 수를 겸하였다고 하겠다. 삼가 보고들은 것을 기록하여 후세 사람에게 전한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초 보만정이 다시 세워졌으나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여 건물의 구조만 남아있는 형태였다. 1969년 충청북도에서 재정지원을 하여 보수가 이루어졌는데, 이때 건물의 부재나 구조가 일부 변경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88년과 2000년에도 군비와 문중의 부담으로 보수가 이루어졌다. 2002년에는 문화재적 가치가 인정되어 검담서원 묘정비와 함께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31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보만정에 들어가는 입구에는 솟을대문이 있고 좌우에 제기고가 있다. 담은 사괴석 담장으로 처리되어 있고, 보만정 앞 뜰에는 검담서원 묘정비가 있는데 배대석이 높고 비신이 크며 가첨석이 중후하다. 보만정 뒤편에는 400여 년 된 측백나무(마을 보호수 : 1992년 1월 11일 지정) 한 그루가 있어 이 건물의 역사를 알려주고 있다. 또한 담장 뒤편 작은 문 바로 앞에는 검담서원(黔潭書院) 매패소(埋牌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