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증평읍 남하리 석조미륵보살입상(曾坪邑 南下里 石造彌勒菩薩立像)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증평군(曾坪郡)

증평읍 남하리 석조미륵보살입상(曾坪邑 南下里 石造彌勒菩薩立像)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8. 2. 12. 07:49





남하리(南下里)는 본래 조선시대 청안현(淸安縣) 남면(南面) 지역이다. 『호구총수(戶口總帥)』(정조 13년, 1789) 기록에는 청안현 남면에 27개리가 있었다. 그 중에서 현재의 남하리와 관련된 마을로는 금반리(金盤里)ㆍ둔덕리(屯德里)ㆍ서원리(書院里) 등 3개리이다. 그 뒤 남하리는 건양(建陽) 원년(1895)에 청안현(淸安縣)이 청안군(淸安郡)으로 승격되면서 청안군의 6개면인 읍내면(邑內面)ㆍ동면(東面)ㆍ남면(南面)ㆍ북면(北面)ㆍ서면(西面)ㆍ근서면(近西面) 중에서 남면(南面)에 속하는 지역이 되었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寒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 당시 청안군 남면은 25개리를 관할하고 있었다. 그 사이 서원리(書院里)가 서동(書洞)으로 변경되었고, 포천리(浦川里)ㆍ금리(金里)ㆍ염곡리(?谷里)ㆍ탑동(塔洞)이 새로 생겼다.1914년에 일본제국주의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증평면(曾坪面)은 11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1917)에 따르면, 남하리는 남면 포천리(浦川里)ㆍ금리(金里)ㆍ염곡리(濂谷里)ㆍ탑동(塔洞)ㆍ금반리(金盤里)ㆍ둔덕리(屯德里)ㆍ서동(書洞)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만들었다. 이때 지역이 남쪽 아래가 되므로 남하리라 하고, 괴산군 증평면에 편입하였다.1990년 12월 31일에 지방자치법 제106조 및 충청북도조례 제1864호에 의거하여 괴산군 증평읍에서 충청북도증평출장소(忠淸北道曾坪出張所)로 바뀔 때, 남하리는 증천지소(曾川支所) 관할이었다. 2003년 5월 29일에 법률 제6902호 「증평군 설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고, 부칙에 따라 3개월 뒤인 2003년 8월 30일에 증평군(曾坪郡)이 공식 설치되어 증평군 증평읍 남하리가 되었다.




남하리 석불을 찾는 날은 바람이 참 많이 추웠다.

바람도 불고 기온도 내려가니 사진을 찍으려니 손이 곱다.남하2리는 둔덕이라고 불리운다.


둔덕(屯德) : 증평읍내에서 남하리로 갈 때 제일 먼저 만나는 마을이다. 즉 ‘금반리’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마을로, 삼기천 가에 있다. 남하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둔덕리(屯德里)라는 마을 이름은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1789년 이전부터 있었던 마을로 추정된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寒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과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도 ‘둔덕리(屯德里)’로 기록되어 있다. 이 마을은 효령대군 8세손 이정(李晶, 1599∼1631)이 병자호란[인조 14년, 1636]을 피해 혼자 몸으로 이거한 곳이다. 이정은 나라를 지키는 데는 인재양성이 중요함을 깨닫고 ‘하루 세 끼 밥은 못 먹더라도 자녀교육과 이웃에 덕을 베푸는 일은 게을리 하지 말자.’는 신념으로 살아갔다고 전한다. 따라서 ‘덕을 둔 곳’이라는 뜻에서 ‘둔덕’으로 불렀다는 전설이 전한다. 그 때문인지 현재 이 마을 주민 중 공무원 등 공직자가 100여 명에 이른다. 그래서 ‘둔덕’은 ‘밥둔덕’으로 부르고, 이웃 ‘염실’은 한학을 한 사람이 많다고 해서 ‘글염실’로 부른다. 그러나 ‘둔덕’은 매우 흔한 지명으로, 그 대부분은 ‘둔덕’의 원 의미 그대로 풀이한다. ‘둔덕’은 ‘두두룩하게 둔진 곳’이니, 마을이 둔덕처럼 높직한 곳에 자리 잡고 있을 때 이 이름이 주로 붙는다. 둔덕은 다시 네 개의 작은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한내’는 ‘둔덕’ 입구 503번도로 가에 있는 마을이다. 삼기천 물가에 약수가 나와 청주ㆍ청원ㆍ괴산 사람들이 모여들어 상가가 성황을 이루었다. ‘한내’는 ‘큰 내’의 뜻으로, 삼기천 물가에 있어 붙은 이름이다. 실제로 ‘(주)디엔피’의 자리에 ‘(주)진로’에서 운영하던 ‘진로석수’ 공장이 있었다. ‘미륵당(彌勒堂)’ 또는 ‘미륵댕이[彌勒堂-]’는 ‘염실’ 서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민속박물관 남쪽 언덕에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208호인 남하리석조미륵보살입상(南下里石造彌勒菩薩立像)이 있다. 석조미륵보살상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중간말’은 ‘둔덕’ 중앙에 있는 마을로, 마을회관이 있다. ‘큰말’은 ‘둔덕’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현재 민속박물관 위쪽 주변 마을이다. 도덕골1 : ‘큰말’에서 내성리 방향으로 넘어가는 골짜기이다. ‘도덕골’은 ‘도덕’과 ‘골’로 나뉜다. 전국적으로 ‘도덕골’ㆍ‘도둑골’ㆍ‘도독골’은 섞여 쓰이면서 여러 가지 유래담이 관련되어 있다. 특히 ‘도둑골’은 ‘도둑’과 관련하여 ‘도둑이 숨기에 좋을 만큼 후미진 골짜기’로 설명한다. 그러나 ‘도둑골’이 ‘도둑’과 관련되는지는 의문이다. ‘도덕골’이 ‘도둑골’ㆍ‘두둑골’ㆍ‘도둔골’이 함께 쓰이고 있음을 볼 때, ‘도덕’은 ‘돋우다’ㆍ‘두둑’과 관련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렇다면 ‘도덕’은 ‘두두룩한’으로 이해되어 ‘도덕골’은 ‘두두룩한 형상을 하고 있는 골짜기’로 풀이해 볼 수 있다. 골짜기가 깊지 않고 두둑하게 올라와 있는 형상이어서 붙은 이름으로 추정된다. 둔덕들 : ‘한내들’과 남하1리 ‘포천이들’ 사이에 있는 들이다. ‘둔덕들’은 ‘둔덕’과 ‘들’로 나뉘며, ‘둔덕 마을에 있는 들’로 풀이된다. 뒷골모랭이 : ‘(주)대유통신’ 부근에 있는 모퉁이이다. 뒤로 돌아가면 ‘솔모루’가 보인다. ‘뒷골모랭이’는 ‘뒷골’과 ‘모랭이’로 나뉘고, ‘뒷골’은 ‘뒤’와 ‘골’이 사이시옷으로 연결된 어형이다. ‘모랭이’는 ‘모퉁이’의 방언형이므로, ‘뒷골모랭이’는 ‘뒤쪽 골짜기로 돌아가는 모퉁이’로 풀이된다. 미륵들(彌勒-) : ‘미륵당’ 북동쪽에 있는 들이다. ‘미륵들’은 ‘미륵’과 ‘들’로 나뉘며, ‘미륵이 있는 들’로 풀이된다. 이 들은 ‘미륵당’과 ‘둔덕’ 사이에 있는데, ‘미륵당’ 마을이 이 들에 형성되었다. 밤나무들 : ‘한내’ 북서쪽에 있는 들이다. ‘밤나무들’은 ‘밤나무’와 ‘들’로 나뉘며, ‘밤나무가 많이 자라는 들’로 풀이된다. 이 들에는 예전에 밤나무가 많았다. 방죽골 : ‘둔덕’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방죽골’은 ‘방죽’과 ‘골’로 나뉘며, ‘방죽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비석거리(碑石-) : ‘둔덕’ 남쪽에 있는 거리이다. ‘비석거리’는 ‘비석’과 ‘거리’로 나뉘며, ‘비석이 있는 거리’로 풀이된다. 열부(烈婦) 광산김씨(光山金氏)의 비석이 서 있는 곳이다. 사장대(射場垈) : ‘둔덕’에서 동북쪽에 있는 산이다. ‘둔덕들’에서 증천3리로 가는 곳에 있다. ‘사장대’는 한자 지명으로 ‘사장대(射場垈)’이다. 따라서 ‘활터’로 풀이된다. 다만 ‘터’를 뜻하는 ‘장’과 ‘대’가 겹쳐 쓰인 유의중복 어형으로 볼 수 있다. 사장들(射場-) : 남하1리와 내성리 사이에 있는, 황토 질흙으로 된 들이다. 비가 오면 장화를 신고 다녀야만 했다. ‘사장들’은 ‘사장’과 ‘들’로 나뉘며, ‘사장’은 ‘활터’를 뜻한다. 따라서 ‘사장들’은 ‘활터가 있는 들’로 풀이된다. 삼선골 : ‘왁박골’[남하3리 골짜기] 북쪽 골짜기로, ‘서당골’ 가기 전에 있다. ‘삼선골’은 ‘삼선’과 ‘골’로 나뉜다. ‘삼선’은 ‘삼신’의 변화형으로 추정된다. ‘삼신’은 ‘옥황상제의 명을 받아 인간세상에서 아기의 많고 적음과 있고 없음, 그리고 해산을 주관하는 신’을 말한다. 일명 ‘삼신할머니’ㆍ‘산신(産神)’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삼선골’은 ‘삼신을 모시는 곳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서녘골 : ‘둔덕’ 남쪽에 있는 들이다. ‘서녘골’은 ‘서녘’과 ‘골’로 나뉘며,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서쪽으로 해가 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당골(書堂-) : ‘미륵댕이’ 남쪽으로 ‘소롱굴골’ 부근에 있는 골짜기이다. ‘서당골’은 ‘서당’과 ‘골’로 나뉘며, ‘서당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선녀골(仙女-) : ‘황아골’ 북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선녀골’은 ‘선녀’과 ‘골’로 나뉘며, ‘선녀가 내려와 노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소롱굴골 : ‘미륵댕이’에서 ‘남대산’으로 오르는 골짜기이다. ‘소롱굴골’은 ‘소롱골골’의 변화형이다. 즉 골짜기를 뜻하는 ‘골’이 겹쳐 쓰인 유의중복 어형이다. ‘소롱골’은 ‘소롱’과 ‘골’로 나뉜다. 여기서 ‘소롱’의 뜻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소롱골’은 전국적으로 발견되는 지명으로, 대개 외진 곳에 있으면서 공간이 좁은 것이 특징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소롱골’은 ‘솔은골’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솔은’은 ‘솔다’의 관형사형이요, ‘솔다’는 ‘공간이 좁다’를 뜻한다. 이런 추정이 사실이라면, ‘소롱골’ 또는 ‘소롱굴골’은 ‘공간이 좁은 골짜기’로 풀이된다. 소징이들[-亭-] : ‘사장대’ 옆에 있는 들판이다. ‘소징이들’은 ‘소징이’와 ‘들’로 나뉜다. ‘소징이’는 ‘소정(-亭)’에 접미사 ‘이’가 붙은 ‘소정이(-亭-)’의 변화형이다. 즉 ‘소정이’가 이모음역행동화에 의해 ‘소젱이’가 되고, 모음변동에 의해 ‘소징이’로 실현된 것이다. ‘소정’은 ‘솔정(-亭)’에서 치조음 ‘ㄹ’이 탈락한 어형이다. ‘솔정’은 ‘소나무 정자’라는 뜻이다. 따라서 ‘소정이’나 변화형 ‘소징이’는 ‘소나무 정자가 있는 곳’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소징이들’은 ‘소나무 정자가 있는 들’로 풀이된다. 오얏고지 : ‘비석거리’ 위쪽에 있는 산이다. ‘오얏고지’는 ‘오얏’과 ‘고지’로 나뉘며, ‘고지’는 ‘곶’에 접미사 ‘이’가 결합된 어형이다. ‘오얏’은 ‘자두’를 뜻한다. ‘곶’은 원래 ‘바다나 호수로 뾰족하게 내민 땅[串ㆍ岬]’이나 약간의 의미 변화가 일어나 ‘들판 쪽으로 산등성이가 쭉 뻗어 나온 곳’을 뜻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오얏고지’는 ‘자두나무가 있는, 들판 쪽으로 쭉 뻗어 나온 산등성이’로 풀이된다. ‘곶’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증평읍 용강2리 ‘꽃산구링이’를 참고하기 바란다. 웃골 : ‘큰말’에서 ‘수덕사’[절]를 지나 남대산 고개에 이르는 골짜기이다. ‘웃골’은 ‘위’의 변화형 ‘웃’과 ‘골짜기’를 뜻하는 ‘골’로 나뉘며, ‘위쪽에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고개를 넘으면 청원군 북이면 송정리로 이어진다. 6ㆍ25 전쟁 시 피난지이기도 했다. 2007년에 증평군에서 ‘인삼로드’라 명명하고 길과 옹달샘을 잘 정비해 놓았다. 이 옹달샘은 가물거나 비가 와도 항상 수량이 변함없고 물맛이 좋다. 그리고 그 물을 먹으면 소원이 다 이루어진다고 해서 증평읍내 사람들과 인근 마을 사람들이 와서 지금도 치성을 드리고 있다. 독립유공자 이찬의 묘소가 절터에 이르는 오른쪽에 있다.


  절터 : ‘웃골’에 있는 절터이다. ‘절터’는 ‘절’과 ‘터’로 나뉘며, ‘절이 있는 터’로 풀이된다. 6ㆍ25 전쟁 전에 ‘성주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통뫼(桶-) : ‘둔덕’에 있는 작은 산으로, 홍수에 떠내려 왔다는 전설이 있다. ‘들노래축제’의 행사장 부근에 있다. ‘통뫼’는 ‘통’과 ‘뫼’로 나뉜다. 여기서 ‘통’은 ‘통(桶)’으로, ‘어떤 물질을 담을 수 있도록 나무ㆍ금속ㆍ플라스틱 등으로 깊이가 있게 만든 물건’을 뜻한다. ‘뫼’는 ‘산(山)’을 뜻한다. 따라서 ‘통뫼’는 ‘통을 엎어 놓은 듯 둥그렇게 생긴 산’으로 풀이될 수 있다. ‘미’ㆍ‘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증평읍 송산2리 ‘안자산2’를 참고하기 바란다. 한내들 : ‘한내’ 남쪽에 있는 들로, 삼기천과 닿아 있다. ‘한내들’은 ‘한내’와 ‘들’로 나뉘며, ‘한내마을에 있는 들’로 풀이된다. 황새말골 : ‘삼선골’과 ‘서당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황새말골’은 ‘황새말’과 ‘골’로 나뉘며, ‘황새 마을에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황아골[-鶴-] : ‘큰말’ 북쪽, 남하3리의 ‘도덕골2’와 ‘선녀골’ 사이에 있는 골짜기이다. ‘황아골’은 ‘황학골’의 변화형으로 추정된다. ‘황학골’은 ‘황학’과 ‘골’로 나뉜다. ‘황학’은 ‘황새’로 풀이되어, ‘황학골’은 ‘지형이 황새목처럼 긴 골짜기’나 ‘황새가 많이 서식하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ㆍ남하리석조미륵보살입상(南下里石造彌勒菩薩立像) : 남하리석조미륵보살입상은 증평 시가지에서 청원군 내수읍 초정리 방면으로 가다보면 남하2리 ‘미륵당’ 133-5번지의 논과 밭 사이 공터에 있다. 불상 3구가 마을을 바라보며 북쪽을 향하여 나란히 세워져 있다. 동쪽의 가장 큰 불상은 2001년 7월 13일에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208호로 지정되었다.. 이 불상은 현재 아랫부분이 땅 밑에 묻혀 있어 정확한 크기를 알 수 없으나 지면 위에 노출되어 있는 부분만 하더라도 350cm에 이른다.. 불상의 주변에서 약간의 기와편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대략 고려시대의 절터로 추정되는데, 이 절터에 대한 문헌기록은 없다. 불상의 재질은 화강암으로 오랜 세월을 노천에서 풍우에 시달려 전체적으로 약간의 마모가 있다. 석질이 약화되기는 하였으나 각부의 조각 양식은 거의 원형대로 잘 남아 있는 편이다. 머리에는 관대가 있는 비교적 높은 보관(寶冠)을 썼는데, 두 귀 위에 장방형의 홈이 있어 보관에 장식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크고 원만한 상호에는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으며, 이마의 눈썹 사이로 백호(白毫)가 양각되어 있다. 두 귀는 길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표현되었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을 배 위에 붙여 외장(外掌)하고, 왼손은 가슴 앞으로 올려 연꽃을 잡고 있다. 옷 무늬의 조각 양식이나 수법 및 규모의 장대함 등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시대 초기[10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왼쪽에 있는 2구의 작은 불상들은 현 위치가 본래의 자리가 아니라 마을 안쪽에서 옮겨 왔다고 전해진다, 마모가 매우 심하여 불상의 형태도 불분명하고. 근래 시멘트로 보수하여 얼굴 등 원형을 크게 상실하였다. 마을 사람들의 구전에 의하면, 예전 이곳에서 가까운 절에 보살이 있었는데 자신의 절이 미륵불 때문에 번창하지 못한다고 오해하고 이 불상들을 넘어뜨려 오랫동안 쓰러진 채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1949년에 속리산 법주사의 윤월인(尹月印) 스님이 이 마을 뒤편 골짜기에 성주사(聖住寺)라는 절을 짓고 마을 주민들의 협조로 쓰러진 불상을 일으켜 세웠으나 보관(寶冠)은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 작은 불상들은 ??허리잘린미륵??으로 불리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옛날 이곳에 큰 부자가 살았다. 그런데 그가 축적한 부는 악독한 방법을 동원해서 얻은 것이었다. 게다가 부를 축적하면 할수록 더욱 인색해졌고, 욕심 또한 날이 갈수록 심했다. 그런데 그 집의 하인 역시 주인을 닮아 인색할 뿐 더러 심술궂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노승이 부자에게 시주를 요청했다. 어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부자는 아는 체하지 않았다. 그리고 계속 울리는 목탁 소리가 시끄러워 하인을 시켜 노승을 쫓아 버리도록 했다. 이에 하인은 빗자루를 들고서 우리 주인 나리께서 시끄럽다고 하신다. 딴 데로 가라! 하며 스님을 내몰았다. 그러자 노승도 "소승은 시주을 받을 때까지 가지 못하겠습니다." 하며 완고하게 맞섰다. 이에 주인이 "거름이나 한 삽 떠 주어라" 라고 말하자, 하인은 시키는 대로 거름을 바랑에 퍼 주었다. 노승은 아무 말 없이 거름을 받고는, "시주를 했더라면 더 큰 부자가 될 방법을 가르쳐주려 했건만......" 하며 아쉬운 낯빛을 띠었다. 하인이 노승의 말에 솔깃해 더 큰 부자가 되는 방법을 물어 보았다. 노승은 "저기 미륵이 부잣집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이 정도의 부밖에 축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저 미륵의 허리를 자르면 큰 부를 축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며 넌지시 비법을 전해 주었다. 하인은 이 사실을 주인에게 알렸다. 주인은 곧바로 미륵의 허리를 잘라버렸다. 그런데 미륵의 허리를 자르자 하늘에서 느닷없이 벼락이 내리쳤다. 또한 미륵의 허리에서 끊임없이 피가 흘러 나왔다. 미륵의 피가 흘러내려 내〔川〕가 생길 정도였다. 부자는 이후에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이 그만 망하고 말았다(충청북도ㆍ증평군ㆍ(사)충북향토문화연구소,2008)



많은 지역에서 전해지는 부자의 욕심에 빗댄 전해지는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둔덕마을과 염실마을사이에 있는 동네간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석불이 바라보고 있는 마을이 풍년이 든다는 이야기에 양 마을의 사람들이 서로 자기마을쪽으로 석불을 돌려 세우려고 했다는 것이다.

마을간의 다툼이 발생하니 다툼을 종결시키기 위하여 석불을 매립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