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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동면 군자리 김종립충신각(孟洞面 君子里 金宗立忠臣閣) 본문
음성에 있는 정려문과 충신문은 거의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김종립 충신각이 영 인연이 닿지를 않았다. 찾고보면 참 쉬운것을 왜 그리 어려웠을까?
맹동면소재지에서 군자리를 찾아 산길을 돌아 군자리에 도착했다.
군자리는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에 속하는 행정리이다.마을은 조선 선조 때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 김종립(金宗立)이 터를 잡아 살았으므로 군자감터라 하였고 그 뒤 변하여 군자동이라 하였다.본래 충주군 맹동면 지역이었으나 1906년 음성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통동 일부로 병합되었고 이후 군자리라 하여 맹동면에 편입되었다. 서쪽에는 함박산[339m], 서남쪽에는 알봉[180m], 남쪽에는 알랑산[209m], 동남쪽에는 덕솔[360m]과 암솔[322m] 등이 있다. 주요 고개로는 선장고개·선돌고개·구진테고개·군자터고개 등이 있다. 미호천 유역 개발 사업으로 1983년에 축조된 통동리 저수지(일명 맹동저수지)는 도수터널로 삼용리 은행나무골에 있는 삼용저수지와 연결되어 있다. 통동리 저수지는 하류 개발은 물론 도수관으로 소속리산맥을 관통시켜 맹동면 서부 지역에 관개 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자연 마을로는 1970년대 말까지 군자터와 방아실 등의 2개 마을이 있었으나 현재는 군자터 1개만 있다. 통동리 저수지의 축조로 군자터의 점말과 점말의 옻샘·터골 등은 수몰되었다. 통동리 저수지는 수심이 깊고 저수지의 상류를 연결하는 도로가 있어 낚시터로의 진입은 용이하다. 문화 유적으로는 군자터에 충신 김종립(金宗立) 충신각이 있다. 주요 도로로는 맹동면 쌍정리의 쌍정교에서 군자터에 이르는 지방도 101번이 개설되어 있다.
통동 저수지에 물이 많이 차있어서 김종립충신각으로 가는 길이 물에 잠겨있었다.
뒤로하여 산을 너머 충신문으로 진입을 해야 했다 . 나무가 우거지고 낙엽이 많이 쌓여있어 충신문으로 진입하기가 어려웠다.그나마 간신히 산을 너머 진입해서 본 김종립충신문도 관리가 안되어 있어 많이 쇠락해진 모습이었다.
충신문 지붕은 비가 새는 관계로 비닐천막으로 임시로 덮어 놓은상태이며 충신문의 붕괴를 우려해서인지 충신문안에 김종립충신문 혐편과 중수기등의 현판도 보이질 않았다. 아마 문중이나 관계기관등에서 보관을 하고 있을거라 추측을 해본다.
맹동면 군자리 김종립묘소(孟洞面 君子里 金宗立墓所) (tistory.com)
김종립(金宗立)은 진천 사람으로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충청감사 정세규(鄭世䂓)가 군사를 일으키자 진천현의 초관으로 적과 싸우다 험천에서 전사하였다. 그때 진천현감 이충운(李翀雲)은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처음 뜻은 그대와 내가 같았으나, 손에 붓대를 잡고 허리에 활을 차는 데서는 재주가 달랐도다. 그대가 나라 일로 죽을 때 나는 구차하게 살았으니, 임을 향하는 뜻이 서로 같았다고 말하기 부끄럽네”라는 시를 지어 그를 애도하였다.
진천의 진사 채진형(蔡震亨)이 김종립의 순절에 대한 전기(傳記)를 매우 상세하게 지었으나, 나라에서 내리는 은전이 이에 미치지 못하였다. 1704년(숙종 30) 손자 김문상(金文商)이 조정에 원통함을 호소하자, 충청북도에 명을 내려 실상을 조사하게 하였다. 조사 결과 김종립의 죽음이 명백하게 밝혀짐으로써 정려하도록 특별히 명하였다.
『음성군 문화유적』 등에는 1624년(인조 2) 무과에 급제하여 군자감봉사·군자감주부를 역임하였고, 정려 현판에도 ‘행통훈대부군자감주부’라 하여 직명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1624년 증광시 무과 급제자 50명에는 이름이 보이지 않고, 진천현 초관(종9품 무관직)으로 전투에 참여하였다는 기록과는 상반된다. 한편 『기년편고(紀年便攷)』에는 무과 출신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김종립 충신각은 현판의 기록에 의하면 1705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충신각은 1983년 원래의 자리에 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옆 산중턱으로 옮긴 것이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목조 기와집으로 전후좌우 네 면을 홍살로 막았다. 정려 안쪽에는 ‘충신증통정대부행통훈대부군자감주부숭정기원칠십팔년을유이월삼일명립(忠臣贈通政大夫行通訓大夫軍資監主簿崇禎紀元七十八年乙酉二月三日命立)’이라 쓴 편액이 걸려 있다. 현판 뒷면에는 1712년 권상하(權尙夏)가 쓴 「김종립전(金宗立傳)」과 한성복(韓星復)이 1980년에 쓴 「충렬정려중건기(忠烈旌閭重建記)」가 하나의 판목에 음각되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김종립충신각을 찾은 날에는 충신문의 현판과 정려기등은 볼수가 없었다.
의성김씨(義城金氏) 시조 김석(金錫)은 경순왕(敬順王)의 다섯째아들이자 왕건의 외손이다.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졌으며 이에 후손들이 본관을 의성으로 하였다. 의성김씨 가문의 조선시대 인물로 김안국(金安國)[1478~1543]은 연산군 때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하여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와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등을 역임하였다.
『동몽선습(童蒙先習)』·『모재가훈(慕齋家訓)』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김성일(金誠一)은 1568년(선조 1)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급제하여 사은사(謝恩使)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을 다녀왔으며,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지키다 전사하였다.
의성김씨 음성 입향조는 시조의 18세손 김준기(金俊起)이며 영조 때 음성군 소이면 금고리로 와 세거하였다. 또 병자호란 때 전사한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 김종립(金宗立)의 후손이 맹동면 군자리에서 세거하였으며, 김석의 19세손 김영일이 음성읍 동음리에서 세거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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