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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면 사인암 일주경천 백천회란(大崗面 舍人岩 一柱擎天百川廻瀾) 본문
대강면 사인암리의 사인암 절벽에 있는데 순조 8년(1808)에 정만석(鄭晩錫,1758∼1834)이 쓴 것이다.
<치솟은 절벽은 하늘을 잡으려는 듯이 우뚝 솟았고 수많은 물줄기가 굽이쳐 흐른다>라는 뜻으로 비온 후의 사인암의 모습과 그 주변 계곡과 암벽에서 흘러내리는 물의 모습을 보면서 느낀 것을 후에 새긴 것으로 보인다.
정만석의 자는 성보(成甫) 본관은 온양(溫陽)이다.1808년 충청도 관찰사를 지내고 1829년 우의정을 지냈는데 시문에 능하고 청백리로 소문이 났다.
암각내용 : 一柱擎天百川廻瀾
정만석(1758 ~ 1834)은 조선 후기 문신.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자 평안도위무사 겸 감진사로 파견, 평안도 관찰사가 되어 피폐된 민생을 잘 수습하여 생사당이 세워졌다.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병조 · 공조 · 이조 · 형조의 판서를 역임, 우의정에 올랐다가 중추부판사로 전임했다.
본관 온양(溫陽). 자 성보(成甫). 호 과재(過齋) ·죽간(竹磵). 시호 숙헌(肅獻). 1780년(정조 4) 사마시에 합격, 83년 문과에 급제하고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을 거쳐 1785년 전적(典籍)이 되었으며, 이어 대간직(臺諫職)을 역임하고 여러 차례 암행어사로 나갔다. 1801년(순조 1) 교리로 정조사(正朝使)를 따라 서장관(書狀官)으로 청(淸)나라에 다녀와서 장령(掌令)이 되고 누차 왕명으로 경상우도 ·전라도 ·충청도를 안렴(按廉)하였다. 1805년 동래(東萊)부사로 가서 뇌물을 받고 쓰시마섬[對馬島]과의 통신서계(通信書契)를 위조한 역관(譯官)을 주살하였다.
이어 도총부부총관 ·형조참판 ·우승지 ·좌승지를 역임한 뒤, 1810년 공조참판으로서 앞서 부총관 시절 도총부의 초기(草記)를 변통한 일이 있다 하여 무주(茂朱)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자 평안도위무사 겸 감진사로 파견, 1812년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피폐된 민생을 잘 수습하여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졌다. 1818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병조 ·공조 ·이조 ·형조의 판서를 역임, 1829년 우의정에 올랐다가 이듬해 중추부판사로 전임하였다. 시문에도 능한 청백리(淸白吏)로서 편서에 《관서신미장계(關西辛未狀啓)》가 있다. 정만석[鄭晩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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