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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암각자 -이유수,민백선,김종수,홍지해,민백분,이양천,이현영,오정원(李惟秀,閔百善,金鍾秀,洪趾海,閔百奮,李亮天,李顯永,吳鼎源)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단양군(丹陽郡)

사인암각자 -이유수,민백선,김종수,홍지해,민백분,이양천,이현영,오정원(李惟秀,閔百善,金鍾秀,洪趾海,閔百奮,李亮天,李顯永,吳鼎源)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9. 2. 6. 17:00




이유수(李惟秀), 민백선(閔百善), 김종수(金鍾秀), 홍지해(洪趾海) 네 명은 사인암을 찾았다가 암석에 각자를 하였다.

그러나 금석문을 잘 보면 홍지해의 이름은 고의적으로 지워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 외에 민백분,이양천,이현영,오정원등의 이름이 각자되어있다.



이유수(李惟秀 1721(경종 1)∼1771(영조 47).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 본관은 전주(). 초명()은 이유목(). 자는 심원(), 호는 완이(). 선조의 9남인 경창군 이주( )의 5대손이며, 서천군(西) 이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정욱()이다. 아버지는 서윤 이재()이며, 어머니는 윤세위()의 딸이다

1747년(영조 23) 유학으로 정시문과에 장원한 뒤, 그 해 정언이 되고, 곧 지평()을 거쳐 수찬()이 되었다. 1751년에는 정언으로 당역자() 9인을 탄핵하다가 영남에 유배되었다. 그 뒤 세자시강원의 관원으로 복직되었으나 이전에 탄핵한 당역자들과는 같이 벼슬할 수 없다고 사퇴하였다. 이에 왕의 분노를 사서 삭탈관직된 뒤 도성문 밖으로 쫓겨났으나, 왕이 뒤에 그 충의를 이해하고 다시 응교에 임명하였다.

1754년에는 사은사(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62년 통정대부로 승지에 오르고, 그 이듬해는 대사간이 되었으며, 1767년에 다시 예조참판에 올라 충청도관찰사가 되고, 그 뒤 대사헌을 거쳐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정익()이다.



민백선(閔百善)에 관한 기록은 전하는 게 거의 없다. 다만 민항열(閔恒烈)의 아버지로 기록되어있다.민항렬은 1745(영조 21)∼1776(정조 즉위년).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민항렬의 아버지인 민백선은 부솔()을 지냈다.부솔은 조선 시대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에 속한 정7품 좌부솔()•우부솔() 등의 관직이다.


김종수(金鍾秀1728~1799) 본관은 청풍(). 자는 정부(), 호는 진솔() 또는 몽오(). 서울 출신. 우의정 김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판 김희로()이고, 아버지는 시직() 김치만()이며, 어머니는 홍석보()의 딸이다. 부인은 교리() 윤득경()의 딸이다. 

1768년(영조 44)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예조정랑, 부수찬()을 지내고, 왕세손 필선()으로 성실히 보좌하였다. 이 때 외척의 정치 간여를 배제해야 한다는 의리론이 정조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뒷날 정치의 제1의리로 삼은 정조의 지극한 신임을 받았다.

1772년 청명(: 청렴함과 명예)을 존중하고 공론을 회복해 사림 정치의 이상을 이루려는 이른바 청명류()의 정치적 결사가 드러날 때, 당파를 없애려는 영조에 의해 조정()·김치인()·정존겸()·이명식() 등과 함께 지도자로 지목되어 경상도기장현의 금갑도()로 유배되었다가 다음 해 방면되었다.

영조가 죽자 행장찬집당상()이 되었고, 그 뒤 승지·경기도관찰사·평안도관찰사를 거쳐, 규장각의 제도가 정비되면서 제학에 임명되었다. 1781년(정조 5) 대제학에 올랐고, 그 뒤 이조판서·병조판서를 거쳐 1789년 우의정에 올랐다.

1792년에 영남만인소()가 올라와 사도세자를 위한 토역()을 주장하자, 예전에 정조와 대담했던 내용인 “순()·주공()과 같은 대공지정()의 도리로서 부모를 섬김이 효도.”라는 소를 올려 이 논의를 가라앉혔다.

다음 해 좌의정에 임명되었고, 1794년사도세자를 위한 토역을 다시 주장한 남인 채제공()과 양립할 수 없다는 의리를 굽히지 않아 정조의 두 의리를 조제하는 탕평에 대한 배신으로 지목되어 평해에 유배, 남해에 이배되었다가 그 해에 치사(: 벼슬길에서 은퇴함)해 봉조하가 되었다.

순조 때에는 척신인 김구주() 및 심환지()들과 당파를 이루어 정조를 기만하고 뒤에서 그 치적을 파괴해 자신의 이익을 추구했다 하여 관작이 추탈되었다가 곧 회복되었다. 1802년(순조 2)에 유언호()와 함께 정조묘에 배향되었다.

임성주()·윤시동()·김상묵() 등과 친하게 교유했으며, 어려서부터 경술()로써 일세를 풍미했다 한다. 정조는 윤시동·채제공과 더불어 3인을 자신의 의리를 조제하는 탕평의 기둥으로 지적하였다. 『문신강제절목()』을 지어 올렸으며, 저서로는 『몽오집()』이 있다.김종수는 젊은 시절부터 청류를 자처하였고 또 그러한 삶을 지향하였다. 벼슬에 오르기 전 20대 초반부터 산수 유람을 즐겼으며,

특히 24세 때에는 이윤영李胤永, 이인상李麟祥, 김상묵金尙默 등과 단양을 유람하면서 맑은 풍류를 누렸고 이후에도 이들 그룹과 산수의 유람을 자주 하였다





홍지해(洪趾海 1720~1777)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자는 백미(伯美)이다. 영조 때 수원부사(水原府使)를 지낸 참판 우전(禹傳)의 손자로, 정조 때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지낸 계희(啓禧)의 아들이다. 1752(영조 2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이 되었고, 1759년 호남지방의 오리(汚吏) 색출의 임무를 띠고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에 특제(特除)되었으며, 같은해 다시 교동농형순심어사(喬桐農形巡審御史)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헌납이 되었고, 그 뒤 부응교·사간·승지를 거쳐 1764년 대사간에 올랐다. 1767년 이조참의에 임명된 후 형조참판·대사헌·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대사성·이조참판·평안도관찰사·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노론벽파(老論僻派)로서 1776년 홍인한(洪麟漢정후겸(鄭厚謙) 등과 함께 정조의 즉위를 반대하였다가 이듬해 정조가 즉위하자 파직당하고 북도(北道)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추자도(楸子島)로 이배(移配)되었다.

이때 아들 상간(相簡)과 두 아우 술해(述海찬해(纘海)가 정조를 시해하고 은전군 찬(恩全君襸)을 추대하려다가 발각되어 대역죄로 처형될 때 함께 주살(誅殺)되었다. 그의 5형제가 모두 등과(登科)하여 영조 때 현직(顯職)을 지냈다.

아내는 여흥민씨로서 민백분의 여동생으로 민백분과의 교류가 좋았다.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했던 민백분(閔百奮 1723~?) ()는 흥지(興之)이며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영조46년인 177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라서 참판(參判)과 충청감사(忠淸監司)를 역임하였다. 그의 손자는 민치록(閔致祿)이다. 민치록은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아버지이므로 그는 명성황후의 증조부(曾祖父)가 되는 셈이다. 그는 17711775년 영조임금당시에 충청도관찰사(忠淸道 監察使)를 두 번이나 역임을 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충청도 관찰사로 재직 시에 사인암을 찾아서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까하고 추정을 해볼 뿐이다.


이양천(李亮天 1716~1755)영목당(榮木堂) 이양천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홍문관 교리를 역임할 때 실학파(實學派)의 거장인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에게 글을 가르쳤으며 연암의 처숙부(妻叔父)이다. 이양천은 단양을 사랑했던 능호관 이인상(凌壺觀 李麟祥)하고도 교류가 있었던 인물이다.


이현영(李顯永 1730~?) 자()는 백회(伯晦)이며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거주지는 일수가 없고 생부(生父)는 이도중(李度重)이다. 그러나 양자(養子)를 가서 기록에는 부친이름이 이항중(李恒重)으로 나온다. 처부는 윤지언(尹之彦)이다.영조(英祖) 42년(1766) 병술(丙戌) 정시(庭試) 병과(丙科) 2위에 기록되어있다.



오정원(吳鼎源 1741~?) 본관은 나주()이고, 자는 공보(, )이다. 헌납을 지낸 오현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1763년(영조 39) 사마시에서 생원 3등으로 합격하고, 1766년(영조 42)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69년 한림원설서에 임명되고, 그해 예문관검열 후보자에 대한 특별시험인 한림소시에 김하재()·유의()와 함께 뽑혔다. 1789년(정조 13) 홍문관의 후보자를 선발하는 도당록에 뽑혀 교리가 되었으나 김이성()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관적에서 삭제되었다. 1793년 나라의 경사로 사면되고, 1795년 사간을 거쳐 이듬해 교리를 지냈다. 1796년 형조참의를 지내던 중 형조의 노예가 백성을 구타하여 죽인 죄로 연대책임을 지고 파직되었다. 1798년에는 경주부윤으로 있으면서 고을의 폐단을 상소하여 시정토록 하였다. 1801년(순조 1) 사간원대사간에 오르고, 1805년(순조 5) 고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가서 정순대비()의 승하를 알리고 돌아왔다.

1793년 나라의 경사(慶事)로 사면되고, 1795년 사간(司諫)을 거쳐 이듬해 교리(校理)를 지냈다. 1796년 형조참의를 지내던 중 형조의 노예(奴隸)가 백성을 구타하여 죽인 죄로 연대책임을 지고 파직되었다. 1798년에는 경주부윤으로 있으면서 고을의 폐단(弊端)을 상소하여 시정토록 하였다. 1801(순조 1) 사간원대사간에 오르고, 1805(순조 5) 고부사(告訃使)가 되어 청나라에 가서 정순대비(貞純大妃)의 승하(昇遐)를 알리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