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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암각자 - 신명원 신명은,신명윤(舍人巖刻字 - 申命源 申命溵,申命潤) 본문
신명원 신명은,신명윤(申命源 申命溵,申命潤)의 각자입니다.
신명원에 대하여는 승정원일기에서 찾을수 있습니다
승정원일기 107책 (탈초본 2062책) 순조 15년 9월 13일 을미 17/19 기사 1815년 嘉慶(淸/仁宗) 20년
申命源의 改差를 청하는 捕盜廳의 啓 ○ 又以左邊捕盜廳言啓曰, 本廳兼從事官申命源, 身病猝重, 勢難察任, 改差, 何如? 傳曰, 允。
신명원(申命源)은 순조5년(1805년)을축년 정시에 급제하였습니다 초직으로 선전관을 지냈습니다.
자(字)는 효백(孝伯)이며 1783년(정조7년)에 출생하였으며 평산(平山)인입니다. 아버지는 신순(申純)으로서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냈으며
조부는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지낸 신대관(申大觀)입니다.
신명은(申命溵)에 관하여는 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1권고종1년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있다.
黃海監司徐衡淳"以豐川府使申命溵, 專事貪墨, 恣行不法, 許多鄙瑣醜聲, 有難枚擧。 衆民不堪其毒, 群聚入庭, 數其過失, 旋又打破吏、校四五家。 如此不法之守令, 不可仍置, 該府使爲先罷黜, 其罪狀, 令攸司稟處"啓。
황해 감사 서형순이 탐오죄를 지은 신명은의 처벌을 건의하다
황해 감사(黃海監司) 서형순(徐衡淳)이, ‘풍천 부사(豐川府使) 신명은(申命溵)은 오로지 탐욕만을 일삼으면서 불법을 자행하기 때문에 허다하게 떠도는 추잡한 소문을 이루 다 들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많은 백성들이 그의 악독한 행동을 견디다 못해 떼를 지어 관청 뜰에 들어가서 그의 죄과를 단죄하고는 네다섯 채의 아전(衙前)과 군교(軍校)의 집까지 파괴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불법을 저지르는 수령(守令)을 그대로 둘 수 없으니, 해당 부사는 우선 파출(罷黜)하고 그 죄상을 유사(攸司)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라고 아뢰었다.
대왕대비가 신명은을 금갑도에 정배하라고 명하다
대왕대비가 전교하기를,
“아! 그는 비록 무관(武官)이기는 하지만 본래 이름 있는 가문의 출신인데 유독 그 조상들이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받아왔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단 말인가? 탐욕스럽고 잔악한 행동이 이처럼 낭자하여 마침내 죄 없는 백성들로 하여금 그 해독을 견디지 못하여 분수를 범하고 소란을 피우는 죄에 빠져들게 하였으니, 참으로 선조를 잊고 나라를 저버려서 양심이라고는 전혀 없는 자라고 할 만하다. 근년 이래로 각지에서 일어난 변고를 그도 들어서 알 것인데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감히 악한 짓을 저질렀으니, 더욱 어찌 극도로 무엄하고 방자한 자가 아니겠는가?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형벌에 처하고 형벌을 가하여 형벌을 없애는 의리에 있어서 그의 목을 베어 뒷사람들을 경책하는 것이 실로 지나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특별히 의(議)과 공(功)을 생각하는 뜻에서 차율(次律)을 적용하라. 의금부(義禁府)의 당상(堂上官)들이 개좌(開坐)하여 네거리에서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서 신명은(申命溵)을 다시 한 차례 엄하게 형신 한 뒤에 금갑도(金甲島)에 위리치안(圍籬安置)하되 삼배도(三倍島)로 압송하라. 장(杖)을 칠 때에는 백관(百官)들을 차례로 늘여 세워서 부끄러움을 알고 두려움을 알게 하라.”[고종3년]
신명윤(申命潤) 평산인으로 벼슬은 참봉(參奉)에 이르렀다.
이인성(李寅聲) 은 제천군수와 예천군수를 지냈다
제천군수시절 이 곳 사인암을 방문하여 각자한 것으로 추측된다.
예천군수시절 울산 울주군 작괘천(勺卦川) 작천정(酌川亭)에 직접쓴 편액이 전해진다
경북의성군 의성읍에는 의성군수시절 이인성에 관한 이야기가 명관의 지혜라는 이름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조 말기, 마지막에서 두 번 째로 부임한 의성 군수는 이인성(李寅聲)씨였다.그의 출신은 서울이라 알려져 오고 관향은 전주(全州)라 한다.
재임 중에는 갖가지 덕업과 큰 치적이 있었는가 하면,범죄인을 잡는 데도 기막힌 예지가 있어서 향내를 놀라게 한 바가 있었다.
7월 어느 날 의성읍 장날에 콧살이 끊겨진 큰 황소가 읍내를 날뛰고 있었다.
피를 흘리면서 아픔을 참지 못하는 소는 눈을 두리번 거리면서 정신을 잃은 듯 날뛰는데 주인도 나타나지 않았다.
즉각 관아(官衙)에 신고가 되고 관속들이 나와서 둘러싸고 소를 쓰다듬어 어루만지면서 고삐도 없는 소의 목에 가까스로 고삐를 감아 매어서 관아에 몰고 갔다.
소를 나무 아래에 매어 두었을 적에 소를 잃은 주인이 나타났다.
소의 주인은 자기 소가 누구에 의해서 해쳐진 것도 모르려니와 당면한 피해 앞에서 정신을 수습할 수가 없었다.이 때에 이(李)군수는 침착한 어조로 오늘 너의 마을에서 의성 장에 온 사람의 이름을 전부 고하라하고 관속은 이를 받아서 적었다. 이어서 소 주인에게 너는 밖에 나가서 이 소가 가장 좋아하는 풀을 깨끗이 한아름 베어 오라고 지시 하였다.
관속들은 군수의 하명 대로 읍내의 장터로 나가서 방을 붙이고 소 주인이 거주하는 옥산면 어느 마을 장꾼들을 전부 찾아서 관아로 불러 들였다.
이 군수는 주인이 베어다 놓은 풀을 장꾼들이 들어오는 사람마다 한 줌씩 쥐고서 소에게 먹여보라고 지시하였다.
아픈 가운데서도 배가 고픈 소는 잘도 받아 먹었고 더 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그러나 몇 사람이 연달아 주는 풀을 그렇게도 잘 먹던 소가 그만 한 사람 차례에서는 콧김을 크게 쉬고는 노려 보면서 떠 받으려는 자세를 취하였다. 그 때에 이 군수의 명이 크게 떨어졌다.저 놈을 잡아묶어라는 불호령이다.
순순히 자백한 범인은 한 동네의 사람이었고 소 주인과의 깊은 갈등이 이런 범죄를 계획하게 되었다고 했다.
소를 팔러 나오는데 따라 와서 외진 그늘나무 아래에 매어둔 소에게 낫으로 코를 베었다는 고백이었고 갈등의 이유는 바쁠 때에 소를 좀 빌려 주지 않았음 이라고 하였다. 범인은 즉각 법대로 처리되었고 읍내의 푸줏간에 기별하여 쇠고기 파는 사람들을 모두 불러 들였다.
그리하여 너희들이 이 소를 잡아서 가급적 오늘 장 시세에 맞추어 가지고 오라고 당부하였다.
이 소식은 삽시간에 전 군내에 퍼지고 멀리 이웃 고을까지 번져나가니 의성 군수 이인성씨는 이름난 명관이 되었다.
그의 선정비(善政砒)는 수년 전까지도 도리원 남대천의 옛 교량넘어 도로변에 역대의 의성군 수령 선정비와 더불어 나란히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가 그 흔적을 잃었으니 애석하다.
조진벽(趙鎭壁) 이정구(李鼎求)이혜수(李譓秀)의 이름도 각자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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