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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읍 벽암리 벽오사(鎭川邑 碧岩里 碧梧祠)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진천군(鎭川郡)

진천읍 벽암리 벽오사(鎭川邑 碧岩里 碧梧祠)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9. 3. 9. 21:41



벽오사(碧梧祠)는 병자호란 당시 만노성에서 통솔자 없이 방황하는 난민들을 통솔하여 적군을 막아낸 유창국(柳昌國)의 공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다.


진천군 진천읍에서 백곡저수지 방면으로 2㎞ 정도 가면 중리 장수마을을 가리키는 바위가 도로 왼쪽에 나타난다. 그 바위 쪽으로 좌회전하여 300m를 직진하면 양쪽에 장승이 서 있고 그 장승을 지나 다시 왼쪽으로 100여m 가면 진천읍 벽암리 적현마을[일명 정자목마을] 뒷산이 보이는데, 벽오사(碧梧祠)는 이 뒷산에 터를 잡고 위치해 있다.





유창국은 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의병장.

본관은 문화(文化). 고려 고종 때의 대사성 유경(柳璥)의 후손이다.


유창국(柳昌國)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가족들을 거느리고 진천 만노산성(萬弩山城)으로 피신하였는데, 이때 성에는 인근 7읍에서 모여든 수천 명의 피난민이 통솔자가 없는 무질서 상태에 있었다. 이에 유창국은 포의(布衣)의 신분이었으나 조감(趙感)과 함께 피난민들의 대오를 정비한 다음 돌을 날라다 성을 수축하고 나무를 베어 성책을 꾸몄다. 또 활과 화살을 만들고 장정들을 요충에 배치하여 준비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였으며, 부녀자들까지 전비를 갖추게 하였다.


[조감을 모시고 있는 백곡의 만뢰사입니다]


마침내 적이 공격해오자 북을 치며 독전하니, 적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물러났다. 이에 유창국은 전군에 이르기를 “적은 내일 또 올 것이니, 준비를 게을리 하지 말라.” 당부하여 전비를 가다듬고 뒤이을 공격에 대비하였다. 이튿날 적이 또다시 공격해오니 유창국은 하루 종일 성 위에 올라가 전투를 독전하였다. 이에 적은 또다시 많은 사상자를 내고 물러가서 다시는 공격하지 않았으므로, 7읍의 주민 수천 명이 그의 지휘에 힘입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전후 관찰사 정인규(鄭仁規)가 중의를 듣고 품의하여 금오랑(金吾郞)에 제수되었는데, 유창국은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으며 이듬해인 1637년(인조 15) 병으로 운명하였다. 1716년(숙종 42) 지부원외랑(地部員外郞)에 추증되었다가, 1851년(철종 2) 공적에 비해 그 지위가 적당하지 않다는 공론에 의거하여 유림 정재경(鄭在褧) 등의 상서로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추증되었다.




벽오사(碧梧祠)는 조선 후기에 건립된 사당으로 1976년에 중건되었다. 외삼문 밖 오른쪽에 위치한 숭모재는 1984년 신축한 것이며, 1987년에는 외삼문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벽오사(碧梧祠)는 북쪽 방향으로 사당이 배치되어 있으며, 돌과 시멘트를 섞은 담장을 두르고 기와를 얹은 형태이다. 정면에는 솟을삼문을 세워 놓았다. 벽오사(碧梧祠) 왼쪽에는 벽오사묘정비(壁梧祠廟庭碑)가 세워져 있다. 1976년 중건된 현재의 사당은 정면 2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며, 반 칸의 앞퇴로 구성되어 있다.





외삼문 밖 오른쪽에 위치한 숭모재는 1984년에 새로 지은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으로 앞의 반 칸은 마루이다. 외삼문은 1987년 중건하였고, 묘정비는 방형 대석 위에 높이 171㎝, 두께 31㎝의 오석(烏石)으로 된 비신을 세우고 가첨석을 얹었는데, 4면비로 후손 유한상(柳漢相)이 지었다. 현재 유창국의 위패를 모신 사당은 그의 고향인 적현마을 뒷산에 지방 유림과 후손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