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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읍 지암리 맷돌(鎭川邑 芝岩里 맷돌)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진천군(鎭川郡)

진천읍 지암리 맷돌(鎭川邑 芝岩里 맷돌)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9. 3. 11. 14:49

 

 

내 마음속에 많이 애착이 남는 유물입니다.몇번 걸음을 한곳이지만 참으로 정이 가는 곳입니다.모처럼 다시 한번 시간을 내어 찾아 보았습니다.

 

 

 

지장사(地藏寺)가 지장보살을 모신 절이어서 마을 지명도 여기서 유래되었다고 전합니다.지장사 터에 관하여 『문화유적총람』에는 “고려시대에 지장보살을 모셨던 사찰이 있었다고 하여 지금까지 지장골 절터라고 전해지는데,사찰이 있었던 유지와 와편을 발견할 수 있다”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절안골이라고 불리우는 지암리4구 에 있는 지장사 절터에 있는 멧돌입니다.깨끗하게 세수하고 환한 얼굴로 맞이해줍니다.

 

 

 

지장사 터의 정확한 존폐 시기는 문헌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습니다. 조선시대의 각종 지리지에도 지장사의 존재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는데,일제강점기의 지리지에는 지장사가 충청북도 진천군 남쪽 2리 지점의 잠덕산에 있는 신라시대의 고찰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일제강점기 일때에도 나름 지장사를 유지하던 많은 유물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축됩니다.

 

 

 

지장사가 있던 터를 살펴보면 지금도 와편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장사 터의 흔적은 약 4,958.7㎡에 이르는 넓은 평지로 남아 있으나, 건물지 등 뚜렷한 유구는 없고 맷돌 1기와 부도 1기가 남아 있을 뿐입니다.절터의 북동쪽 계곡 옆에 보존되어 있는 맷돌은 현재 밑돌만 남아 있는데, 매우 거대한 형태로서 둘레에 매판을 1석으로 조성하였습니다.매판의 둘레 윗면의 명문으로 보아 만력 4년 즉 1576년(선조 9)에 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로써 지장사가 조선 중기까지 큰 영화를 누렸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이곳은 영조때 성리학의 대가 봉암 채지흥이 이곳을 다녀간 후 시한 수를 지어 놓은 것이 상산지 및 진천군지에 전해옵니다.이와같은 사실로 보아 지장사는 영조때까지는 존속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원래 지옥에서 고생하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마련이 된 듯합니다.그것은 지장보살이 지옥에서 방황하는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기 때문입니다

 

 

 

 

 

지장사터 맷돌의 짧은 쪽 길이는 153㎝, 긴 쪽 길이는 163㎝입니다. 전형적인 우리나라 맷돌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매판까지 같은 돌로 제작하였습니다. 이 맷돌이 중요한 것은 매판 둘레 윗면에 ‘만력사년병자대화주신여비구천□유□(萬曆四年丙子大化主信女比丘天□有□)’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는 점입니다. 이 명문으로 인하여 지장사터 맷돌이 1576년(선조9년)에 제작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에전(2012년)에 찍은 사진에는 주위의 낙엽송등으로 인하여 맷돌에 써있는 글씨를 볼수없었습니다.모처럼 찾은날은 문화재돌봄 센타에서 이리 맷돌을 깔끔하게 정리하여 놓았습니다.비지정문화재까지 수고를 해주는 관계기관에 감사합니다.

 

예전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입니다 환골탈태입니다.

 

 

 

 

 

 

 

 

 

 

 

 

 

지장사터 맷돌이 바라보는 곳이 지장사가 있던 터입니다.주위로 산에서 흐르는 식수로 사용할수 있는 물줄기도 있습니다.

사찰이 스러진 절터위로는 낮선 손님에 놀라 오수에서 깨어난 고라니의 바쁜걸음이 가득합니다.

 

 

 

 

 

 

 

 

 

 

 

충청북도 문화재돌봄사업단이 주위를 깨끗히 정리하여 놓았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지금도 예전의 지장사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