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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백면 도하리 표암 강세황선생묘소(文白面 道下里 豹菴 姜世晃先生墓所) 본문
문백면 도하리 동네 뒷산에 자리하고 있는 표암 강세황의 묘소입니다.
도하리는 하대음리, 도장리, 판랑리 일부를 병합하면서 도장과 하대음의 이름을 따서 도하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난민촌, 별황건너, 심촌, 양지말이 있다. 난민촌(難民村, 난민수용소)은 도하리에 있는 마을로 난민들이 이룩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벌황건너는 이 마을에 가려면 지금의 성암천(옛날에는 황폐된 벌판)을 건너야 한다고 해서 이름 붙여졌다. 위쪽에 있는 곳은 윗황 건너이고, 아래쪽은 아래황 건너라고 부른다. 심촌(沈村)은 옛날에 심씨(沈氏)가 많이 살았다 하여 생긴 지명이다. 지금은 한 가구도 살고 있지 않다. 번담은 도장배 북쪽에 있는 들로 옛날 이곳은 황폐한 벌판이었는데, 처음으로 논을 만들어 옥답으로 바뀐 곳이라 하여 이름 붙여졌다.
깅세황은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서화가입니다.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광지(光之), 호는 첨재(添齋)·표옹(豹翁)·노죽(路竹)·산향재(山響齋)·표암(豹菴), 시호는 헌정(憲靖). 1713년(숙종 39) 한양에서 태어나 1791년(정조 15) 세상을 떠났다. 시(詩)·서(書)·화(畵)의 삼절로 불렸으며, 식견과 안목이 뛰어난 사대부 화가였다. 진경산수화를 발전시켰고 풍속화와 인물화를 유행시켰으며 새로운 서양화법을 수용하는 데도 기여하였다.
할아버지는 판중추부사를 지낸 강백년(姜栢年)이고, 아버지는 예조판서를 지낸 강현(姜鋧)이며 어머니는 광주이씨 이익만(李翊晩)의 딸이다.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강세황 자신까지 71세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감으로써 이른바 삼세기영지가(三世耆英之家)로 칭송받았다.
강세황(姜世晃)은 1744년(영조 20)에 처가인 안산의 청문당(淸聞堂) 근처로 이주하여 30여 년간 학문과 서화에 몰두하며 지냈다. 1773년(영조 49) 영조의 배려로 처음 영릉참봉으로 벼슬길에 올랐으며, 1775년(영조 51) 한성부판관이 되었다. 1776년(영조 52)의 기로과(耆老科)와 1778년(정조 2) 문과정시에 장원한 후 한성부우윤과 한성부좌윤, 호조참판과 병조참판을 거쳐 1783년(정조7) 한성부판윤이 되었고, 1785년(정조 9)과 1789년(정조 13)에 다시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다.
강세황은 화보를 통해 중국의 남종화를 익히긴 했지만, 조선의 미감에 맞는 남종화를 성립시켰다. 강세황의 화풍은 후에 심사정(沈師正)·김홍도(金弘道)·김윤겸(金允謙)을 비롯한 여러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던 10년 동안 작가로서의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다른 화가의 그림에 평론을 많이 남겼고, 특히 김홍도의 그림에 많은 평을 남겨 그의 그림에 많은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그는 예림(藝林)의 총수라 불리며 당시 거의 모든 화가들의 그림을 보고 평론을 남김으로써 남종화가 유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80세 생일잔치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로 그의 사군자(四君子) 작품이 더욱 품격이 높아졌다고 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결성범주도」, 「벽오청서도(碧梧淸暑圖)」, 「산수대련」, 「연강제색도(烟江霽色圖)」, 「녹죽(綠竹)」, 「백석담도 (白石潭圖 )」, 「영통동구도(靈通洞口圖)」, 「청석담(靑石潭)」, 「풍설과교도」, 1784년 중국사행 중 중국의 실경을 담고 시를 함께 실은 『중국기행첩』, 그리고 자신의 70세 때 모습을 그린 「자화상」 등이 있다. 문집으로 『표암유고(豹菴遺稿)』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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