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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면 사담리 송풍석각자(靑川面 沙潭里 松風石刻字) 본문
조선후기 서예가이며 문신이였던 윤순이 교류하던 이하곤등과 화양동 등을 유람하면서 각자한 것으로 전해진다
바위에 새겨진 글씨주변에서 주춧돌등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주위에 정자가 있지 않았나 추정이 된다.
송풍석이란 글자가 각자된 바위옆으로 절벽에는 정자가 있었을거로 유추할수있는 바위에 홈을 판 흔적이 자리하고 있다.
주위에서 터 정리를 하다가 발견된 주춧돌입니다
글씨상태는 보존이 양호합니다.
윤순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사헌부 지평이었던 부친 윤세희(尹世喜)와 전주 이씨로 승지였던 이동규(李同揆)의 딸 사이에서 2남 3녀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형은 육조의 판서를 역임한 윤유(尹游)이다. 연일정씨(延日鄭氏) 정제태(鄭齊泰)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부인은 양명학의 거두 정제두(鄭齊斗)의 조카이기도 하다. 슬하에 자식이 없어 형 윤유의 삼남 윤득여(尹得輿)가 가계를 이었다.
윤순이 출사했던 당시는 노소정쟁(老少政爭)에 의한 여러 사건으로 인해 소론출신의 윤순은 진퇴를 거듭하였다. 윤순은 영조의 각별한 배려와 자신의 조심스런 행장(行藏)으로 정쟁의 예봉을 피하면서 문사로서의 위치를 지켜갔으며, 숙종 · 경종 · 영조 등 삼대에 이르는 동안 대사헌 · 대제학 · 이조판서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1723년에 사은사서장관으로 청(淸)에 다녀왔는데, 사행은 중국의 역대 서법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갖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윤순의 가문은 노 · 소(老 · 小) 분당 이후로 윤증 · 박세당 등의 소론학맥을 따랐다. 윤순 역시 가학을 따랐지만, 정제태(鄭齊泰)의 사위가 되면서 그의 형 정제두에게 나아가 양명학을 접했다. 윤순은 정제두를 통해 양명학을 이해하면서 주자성리학 일변도의 학문적 편협성에서 벗어나 사고의 유연성을 지닐 수 있었고, 이러한 철학적 기반은 윤순이 극렬했던 노소정쟁에 휘말리지 않고 삼대의 조정에 설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윤순은 대부분 소론계 인사들과 교유하였다. 이 가운데 이하곤은 윤순과 가장 가까웠던 인물로, 형 윤유 등과 함께 속리산 · 화양동 · 두타산 등의 명소를 유람하는 한편 이하곤의 문집 『두타초(頭陀草)』의 초고를 필사해 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밖에 이정제(李廷濟)는 이른 시기부터 친교를 나눈 사이였으며, 이덕수는 박세당의 문인이자 증광시에 함께 입격한 동료로서 평생지기로 교유했고 사돈지간의 인연을 맺었다.
학문적으로 교유한 인사로 최창대를 들 수 있는데, 문장에 뛰어나고 경서에 밝아 윤순에게 학문적으로 적지않은 영향을 주었다. 정제두 문하의 동료문인이었던 심육과도 친분이 있었다. 심육은 윤순이 따랐던 심수현의 아들로, 이하곤과 함께 서로 우의를 나눈 사이이다. 윤순이 교유한 인사들은 모두 필한(筆翰)에 뛰어났다.
이 가운데 서명균은 진 · 당(晉唐) 서법에 뛰어나 많은 비명을 썼고, 이진수(李眞洙) · 이진순(李眞淳) 형제는 윤순과 이름을 같이할 만큼 글씨에 뛰어났으며, 김동필(金東弼)은 서화를 두루 잘했다. 이 밖에 이하곤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회화에 대한 넓은 식견을 가졌으며, 이덕수 · 이종성(李宗城) · 조명교(曺命敎)는 윤순과 함께 많은 비갈명을 짓고 전액(篆額)을 썼다.
중국 서법에 대한 윤순의 인식은 문집 『백하집(白下集)』에 실린 몇 편의 제발(題跋)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가운데 「이성이 소장한 자암 김구의 서첩 뒤에 쓴 글(書伊聖所藏自庵帖後)」에 따르면 윤순은 서법의 이상을 왕희지에 두었으며, 초당(初唐)의 우세남 · 저수량이 왕법의 요점을 전했다는 점에서 부정적이지 않았다. 반면 안진경과 그를 따른 유공권, 그리고 이들을 찬양하고 배운 송(宋) 소식 · 채양에 대해서는 왕법의 본의를 변질시켰다고 보았으며, 이후 명대(明代) 서예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이에 윤순은 왕법의 전통을 우리나라 서가에서 찾아 김생(金生)과 김구(金絿)를 높게 평가했다.
윤순은 이처럼 중당(中唐) 이후의 서예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보였지만 그러면서도 김생 · 김구처럼 왕희지를 깊이 이해했던 후대의 서예가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중국의 서예가로서 송대의 미불(米芾)과 원대의 조맹부(趙孟頫)가 바로 그러한 예이다. 이광사는 서예 이론을 서술한 『서결(書訣)』에서 스승 윤순의 말을 인용하면서 윤순이 미불의 글씨를 고일한 글씨로 평가했음을 언급하였다.
미불은 처음에 안진경 · 저수량을 배웠으나 그들의 글씨가 왕희지의 <난정서(蘭亭敍)>에서 나왔음을 깨달은 뒤 위진고법(魏晉古法)을 바탕으로 평담(平淡)한 서풍으로 돌아갔고 천성 · 자연 등을 강조하는 등 인위적인 글씨를 배격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진 · 당(晉唐) 서법에 대한 윤순의 인식은 미불과 유사하여 그가 미불의 서풍을 크게 수용하게 된 근저를 이루었다. 윤순은 또한 "「신경이 사온 조자앙의 서첩 뒤에 제하다[題信卿所購趙子昻書後]」."라는 글에서 조맹부의 글씨를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배우지도 않는 당시의 세태를 지적하였다. 이는 송설체에서 멀어진 시대 속에서도 왕희지 서법의 재현에 있어 조맹부가 누구보다 뛰어난 서예가라는 것을 인식했던 것이다.
이상으로 보면 역대서법에 대한 윤순의 인식은 이중적 성향을 띠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왕희지를 위시한 고법을 귀중히 여기고 안진경 이후의 당 · 송 · 명의 서예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면서도, 한편으로 고법을 깊이 이해했던 후대의 서예가에 대해서는 우호적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현존하는 윤순의 필적에는 고법을 포함하여 다양한 서풍이 남아 있다. 따라서 역대서법에 대한 인식은 일종의 이상적 목표 내지 궁극적 귀의처일 뿐 현실적 수용에 있어서는 상당히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윤순이 초년시절에 누구로부터 글씨를 배웠다는 기록은 아직까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글씨에 뛰어났던 선조들로부터 가풍으로 이어받아 타고난 재질로 일가를 이루었다고 여길 따름이다. 현존하는 윤순의 글씨는 대부분 해서 · 행서 · 초서이며 서 · 예서는 매우 적다. 윤순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고대 금석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일어나 일부에서는 진 · 한대(秦漢代)의 전 · 예를 수용하기도 하였지만, 아직까지 해 · 행 · 초가 주류였고 윤순이 수용한 글씨 또한 대부분 그러했기 때문에 전 · 예에는 그다지 전심하지 않은 듯하다.
윤순은 왕희지와 안진경 · 소식 · 문징명의 해서를 두루 수용했다. 이들 가운데 특히 <황정경(黃庭經)>, <유교경(遺敎經)>을 즐겨 임서했고 그 유행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한다. 소자(小字)로 쓴 해서는 대부분 왕체소해의 영향을 받았으며, 중자나 대자로 쓴 비갈(碑碣) 중에는 안진경 · 소식의 해서풍을 수용한 예도 있다. 김정희는 윤순이 문징명의 소해를 배워 짧은 세로획의 위쪽이 굵고 아래로 쏙 빠진 점을 닮았다고 하였는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윤순필서화첩(尹淳筆書畵帖)》에 실린 소해에서 그러한 유사성이 보인다.
윤순의 행서는 왕희지 계통의 행서를 근간으로 미불의 행서풍을 크게 수용했으며, 동기창의 서풍도 일부 수용했다고 여겨진다. 윤순이 쓴 비명 가운데 연대가 이른 것들은 대부분 왕희지 계통의 행서풍을 보이며, 나머지는 거의 미불의 행서풍이 강하게 나타난다. 대자로 쓴 <두보시 고백행(杜甫詩 古栢行)>(1731)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칠언절구>는 미불과 같은 필의로, 획의 태세(太細)와 먹의 윤갈(潤渴)에 변화가 많아 유연하면서도 경쾌한 느낌을 준다. 이처럼 미불 행서를 바탕으로 한 글씨가 윤순 행서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데, 그 필치는 평담함과 자연스러움을 추구했던 미불의 글씨에 비해 짜임과 운필에 변화가 많으며 자태가 아름답다.
윤순의 초서는 행서와 같이 고법을 바탕으로 송 · 명의 초서풍을 수용했다. 현전하는 초서 필적은 대부분 미불의 초서풍을 수용했거나 이를 바탕으로 자기화한 것들이다. 이 가운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윤백하필서축(尹白下筆書軸)》에 실린 <고시(古詩)>(1737)와 같은 예는 고법의 자형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중봉세를 사용한 빠른 운필이나 의도적인 태세의 강조 등에서 동기창 서풍의 수용을 짐작케 한다.
윤순이 동기창의 글씨를 배웠다는 기록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으나, 미불글씨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송대 명적을 널리 이해했던 동기창에 관심을 가졌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된다. 이미 강희제 이래 동기창 추숭과 함께 동기창의 글씨가 널리 유행했고 그의 생전부터 필적이 간행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17세기 말~18세기 초를 즈음하여 남종화풍의 전래와 함께 동기창의 회화가 어느 정도 수용되었음을 보면 동기창의 서예에 대한 이해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윤순의 글씨는 왕희지 등의 고법에 바탕을 두면서도 당 · 송 · 명의 역대 글씨를 두루 수용했는데, 특히 행 · 초에서 미불의 글씨에 크게 힘입었으며 문징명의 해서풍과 동기창의 행 · 초서풍도 수용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윤순의 글씨는 각각이 미묘한 정취를 보이는데 이는 윤순이 여러 가지 서풍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분위기를 교묘하게 변환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윤순의 글씨에 대한 평가는 의례적인 상찬도 있고 실제적인 지적도 있다. 조귀명은 윤순의 서첩에 대해서 마치 옷감가게에 들어가 무늬비단을 보듯 가지각색이며 새롭고 교묘하다고 평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명필 3대가로 안평대군 이용, 석봉 한호와 더불어 윤순을 들었는데, 윤순의 글씨는 법도(法度)와 변태(變態)로써 대적할만하다고 평하였다. 이는 윤순이 서법의 도리를 지키면서 그 태도를 변화시킴에 있어 누구보다 뛰어났다는 말로 이해된다.
또한 신위는 윤순의 글씨에 태도(態度)가 많아 동기창에 비견할만하다고 하며 마치 거울 속에 예쁜 부인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고 하였는데, 이처럼 동기창 글씨의 특성을 윤순의 글씨에 비유한 것은 윤순의 동풍(董風) 수용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부분이다.
윤순의 글씨를 평가한 기록은 여럿 있지만 실제 현존하는 필적을 대상으로 한 평가가 아니기에 온당한 논평의 척도로 삼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 이런 점에서 1737년 3월에 쓴 《윤백하필서축》에 실린 이덕수 · 홍양호 · 강세황 · 조윤형 4인의 제발(題跋)은 윤순의 글씨에 대한 논평을 실증할 수 있는 좋은 예이다. 이들 발문의 대강의 요지는 윤순이 진 · 당 이래 명가들의 장점을 취합하여 일가를 이루었는데, 이 서축의 해서는 안진경과 소식의 서풍이 강하고, 행서는 왕희지에 근거하면서 미불을 크게 수용했으며, 초서 또한 고법에 의거하면서 미불을 수용했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윤순이 신라 김생의 맥을 이으면서 당 · 송 · 원 · 명을 깊이 이해하여 이를 왕희지에 절충했다는 홍양호의 평은 윤순 서예의 요체를 잘 지적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윤순의 글씨에 나타나는 '요교(夭矯) · 농엽(穠燁) · 자미(姿媚) · 수미(秀媚)'한 글씨, 즉 지나친 꾸밈에 대해서는 여지없이 비판을 가했다.
윤순은 서예의 이상을 왕희지체에 두면서 그 요점을 계승한 초당(初唐)의 서예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지 않았지만, 안진경을 비롯한 중당(中唐) 이후의 서예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그러면서도 고법에 이해가 깊었던 미불이나 조맹부에 대해서는 선별하여 우호적인 입장을 보였으며, 실제로는 자신이 비판했던 안진경 · 소식 · 문징명 · 동기창의 서풍도 수용하였다.
이처럼 윤순의 글씨는 역대 서예에 대한 인식과 달리 실제에 있어서는 매우 다양한 양상을 보여준다. 역대 서예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무엇보다도 명말 이래의 중국서화론이 국내에 점차 소개되면서 당 · 송 · 명의 서예에 대한 이해가 넓어졌던 데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이미 조선 중기에 접어들면서 여말선초 이래로 풍미했던 송설체에서 왕희지체를 기본으로한 고법(古法)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였지만, 오랜 번각으로 인한 왕체 법첩의 한계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당 이후의 서예를 통하여 그 해결책을 모색하게 되었고, 윤순 역시 그러한 흐름 속에서 안진경 · 소식 · 미불 · 문징명 · 동기창 등을 통해 고법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으며, 누구보다도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서예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 넣었던 것이다.
윤순의 서예는 일세를 풍미했고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 중에서도 미불서풍의 선호는 추종자들에 의해 다양하게 변모되어 갔고, 또 동기창 서풍의 수용은 18세기 후반부터의 동기창 서풍 유행에 선행이 되었다. 또한 윤순으로부터 심대한 영향을 받은 이광사 등은 위진고법에 천착하고 나아가 이전의 전예고비(篆隸古碑)를 학습하여 윤순의 서예를 계승적으로 변모시켜 갔다. 따라서 윤순은 중국의 역대 서법을 두루 수용하고 이를 다양하게 구사함으로써 조선 후기 서예를 새로운 단계로 이끌어간 대표적인 서예가였다. 윤순 [尹淳]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2011.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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