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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면 덕평리 김시약장군묘지(靑川面 德坪里 金詩若將軍墓地)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괴산군(槐山郡)

청천면 덕평리 김시약장군묘지(靑川面 德坪里 金詩若將軍墓地)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9. 8. 6. 11:02



청천면 덕평리에 위치하고 있는 김시약장군과 두 아들의 초혼묘입니다.

초혼묘(招墓)라 함은  유골이 없는 분의 혼백을 모신 묘를 말합니다.



김시약장군의 묘의 석물은 모두 후보된것입니다.

근간에 김시약장군 헌정비등을 세우면서 장군석과 동자석 망주석과 상석등 많은 석물을 새로 장만하였습니다.

무덤을 보호하는 호석도 모두 2003년에 새로 후보하였습니다.


[충숙공 김시약(金時若)장군 아들 김규(金糺) 묘]


김시약은 조선 후기 정묘호란 때 절개를 지킨() 사람이다.

본관은 안동()이며, 자()는 기오()이고 청주 출신이다. 비안현감() 김인갑()의 아들이며, 진주목사(使) 김시민()의 종제이다.동부승지()를 역임하고 병조참판(兵)에 추증()되었다.


서애(西) 유성룡()의 천거로 훈련원() 첨정()을 거쳐 만호()·첨사(使)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1596년(선조 29) 괴산() 선봉장으로 창의병()을 거느리고 각지에서 왜적을 격파하고 관찰사(使)의 천거를 받아 별장()에 발탁되었다. 이듬해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관군과 의병을 인솔하고 창원, 옥천에서 왜군 24명을 사살하였다.

인조반정 후 동부승지()가 되고, 이듬해 1624년 의주부윤()이 되었다가 다시 창성부첨절제사(使)가 되었다. 1627년(인조 5)정묘호란에 성이 함락되고 그의 두 아들 김환(), 김규()와 함께 적에게 사로잡혀 굴하지 않고 죽음을 당하였다.


[충숙공 김시약(金時若)장군 묘]




[충숙공 김시약(金時若)장군 아들 김환(金絙) 묘]


김시약장군의 묘를 중심으로 좌우로 두아들의 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좌)김규(金糺) (중)충숙공 김시약(金時若)장군 (우)김환(金絙) 묘를 뒤에서 보았습니다]





김시약장군의 무덤에 상석으로 쓰였던 석물이 세월의 이끼를 덮고 한켠으로 물러서 있습니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 목숨을 내어놓고 싸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임진왜란(壬辰:1592) 때 삼 대첩 중에 가장 적은 인원으로 가장 큰 적군을 가장 빠른 시일에 무찌른 진주대첩의 명장 김시민(1554~1592)장군의 서제(庶弟)로서, 김시민장군이 39세 되던 해에 진주목사로 부임하면서 열 살 아래 동생 김시약을 대동하고 그해 10월 3만 여명의 왜군이 진주성을 침략했을 때 주민들과 한 몸이 되어 6일간의 전투에서 진주대첩을 이루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성을 순시 중 시체 속에 숨어 있던 왜병의 발포로 미간을 맞고 쓰러졌다. 급히 김시민장군은 자기와 닮은 동생에게 옷을 갈아입게 하고 “너는 나를 대신해 군중을 통솔하고 인심을 진정하라, 그리고 이城을 보존하라.”라는 말을 남기고 순절하였다. 전쟁을 마친 김시약은 시신을 모시고 충주 살미무릉동에 장례를 모시고 보니 원주의 숙부 김제갑과 숙모 이씨, 사촌 김시백이 왜병에 순국한 것을 알았다. 이에 분개 선조29년(1596년) 33세 되던 해에 괴산에서 선봉장이 되어 의병을 이끌고, 경상도 창원 옥포까지 원정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로 인해 암행어사 최기남이 올린 장계를 받은 서애 유성룡의 천거로 동부승지를 제수 받았으나 즉시 사양하고 북쪽 오랑캐를 대비하여 선발된 임경업 정충신 김시약과 함께 명장으로 선발 되었다. 그 후 인조2년(1624) 60세 되던 해 의주부윤이 되었다가, 62세 되던 해에 창성부사가 되면서 무(武)를 굳세게 하고 백성들의 인심을 이탈치 않게 소중히 구휼하고 하여 자신보다는 겨레와 국가를 위해 멸사봉공한 성실한 목민관으로 소문이 나자 평안도 관찰사 이상길이 장계를 조정에 보냈다. 64세 때인 인조5년(1627)에 압록강의 얼음판으로 건너 침략한 청나라 누루하찌의 후계자 군졸에 의해 순절하니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이때 두 아들 ‘긍’과 ‘규’에게 “내가 나라의 후은을 받아 갚을 길이 없더니, 이제 죽을 곳을 얻었으니 내 마음 기쁘다. 너희들은 이 자리를 피해 너의 노모를 봉양하라” 하니 장자가 하는 말 “부주께서는 나라위해 죽는 것이 당연한 절의요, 소자는 부주와 명을 같이 함이 불가합니까.” 이렇게 하여 아버지는 나라위해 죽고 큰 아들은 아버지 위해 죽고 둘째 아들은 자식으로서 한 칼에 명을 버리는 것이 영광으로 생각하여 삼부자가 한자리에서 순절하니 세계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 일어났다. “내 머리는 베어도 내 뜻은 뺐지 못할 것이니 어서 죽여라”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책형(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을 당했다. 그리고는 시신을 압록강에 던져 버렸으니 누가 시신을 찾기 위해 절취부심 했겠는가? 그 후 유족이나 가족의 “삼부자가 한꺼번에 없어진 그 허전함을 어떻게 달래며 살았겠는가? 순절 후 56년(숙종9년)1683년에 정려 건립을 명하여 淸州郡 東面 大田里(현 괴산군 청천면 대전리) 충효삼문을 세웠다.
그후 김시약의 종질 김대곤의 아들 김정윤이 사후 63년인 숙종16년(1690)에 “충신 김시약행장(忠臣金時若行狀을)” 저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