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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백면 장월리 망북정(文白面 長月里 望北亭)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진천군(鎭川郡)

문백면 장월리 망북정(文白面 長月里 望北亭)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0. 10. 6. 08:57

 

 

 

 

 

 

 

 

 

 

 

 

 

 

 

 

 

 


망북정은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장월리에 있는 조선 전기 정자를 말한다.
망북정(望北亭)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에서 진천읍으로 가는 도로변의 월호마을[다람비마을] 끝자락의 널찍한 바위 위에 걸쳐 있다.
망북정은 조선 성종 때 숭의전참봉(崇義殿参奉)을 지낸 김자(金磁)가 사직한 뒤 낙향하여 처음 지었다. 정자 내부에는 안형렬(安亨烈)이 쓴 망북정 중건기가 걸려 있는데, 내용에 의하면 본래의 정자가 멸실됨에 따라 인조 때 증손인 김내현(金鼐鉉)이 재건하였으며 그 9세손인 김보제(金寶濟)가 1976년 8월에 다시 세웠다고 한다.

한편 망북정이란 명칭은 인조 때 당파싸움이 치열해지자 벼슬길에서 물러나 낙향한 김내현이 언제나 임금의 은혜를 생각한다는 데서 붙인 것이라 한다. 김내현망북정이라는 액자를 건 뒤에 날마다 정자에 나와서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하여 사배(四拜)하면서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눈물을 흘렸으며,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후학을 양성하였다고 한다.


망북정은 민도리집 양식으로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기둥과 도리 등 대부분이 콘크리트로 되어 있으며 바닥 또한 시멘트로 처리하였다. 다만 서까래와 부연은 나무를 사용하였으며 기와는 전통적인 한식 기와 대신에 근대적인 시멘트 기와를 올리고 파란색으로 마감하였다.
망북정 옆에는 월호마을 어린이 놀이터라는 오각형의 작은 정자가 있으며, 그 왼쪽에는 1970년대에 세운 김자 유허비가 보호비각 안에 있다. 비제는 ‘숭의전참봉경주김공자유허비(崇義殿參奉慶州金公磁遺墟碑)’이며 방형 대석 위에 비신을 세우고 가첨석을 얹었다. 유허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다. 현재 망북정진천군에서 소유하고 있으며, 월호마을에서 관리를 맡고 있다.
망북정은 마을 내에 건립된 정자로서 입지 조건이 우수하고 역사적 배경이 깊으나 콘크리트 건물로 되어 있어 다소 역사적 가치가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된다.

 

 

김내현의 자는 화백(和白)이며 본은 경주(慶州)니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의 7세손이다.

공은 선조(宣祖) 34년 1601년에 문백면 장월리 월호촌(文白面長月里月湖村)에서 출생하였다.

공은 천성이 청렴결백하여 정의 앞에는 어디까지나 찬성하지마는 불의 앞에는 조금도 굽힐 줄 모르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광해조(光海朝)의 혼란하고 깨끗하지 못한 조정에 있는 유림들이 과거를 보라고 권하였지만 아무 대답도 아니하고 응시하지 않았다. 불의와는 누가 무슨 말을 하던지 타협할 줄 모르고 끝까지 반대하였다. 다만 조용히 학문 연구에만 열중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있은 뒤에 음직으로 벼슬길에 나아갔다. 한성부 좌윤(韓城府左尹)으로 있을 때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다. 그 때 인조 대왕(仁祖大王)이 삼전도(三田渡)에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항복을 하였으니 형용할 수 없는 욕된 일이었다. 병자호란이 있은 뒤부터 당파싸움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지기만 했다.

공은 그 때의 형편을 자상하게 살피어 보았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은 하나하나 벼슬길을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1638년에 단안을 내린 뒤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월호촌(月湖村)으로 내려왔다. 이 곳은 진천서 시내버스로 약 15분간 가면 문상초등학교(文祥初等學校)에 도착한다. 그 곳에서 내려 야산을 돌아 북쪽으로 가면 장월 평야(長月平野)와 덕문평야(德文平野)가 보인다. 이 두 평야 남쪽에 소나무가 울창한 곳에 조그마한 정자가 있으니 여기가 망북정(望北亭)이다.

공은 고향으로 온 뒤에 이곳에 정자를 짓고 후진 교육으로 한가한 세월을 보냈다.

공은 조상 때부터 내려온 교훈인 충효 정신을 실천에 옮기었다. 날마다 정자에 나가서 임금이 계신 곳 북쪽을 향하여 사배(四拜~네 번 절하는 것) 하였다. 그 때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라안이 편안하게 되기와 임금의 만수무강을 빌면서 눈물을 흘리었다. 얼마동안 눈물을 흘리다가 일어나는 일이 날마다 계속되었다. 이러기에 선생의 나라 사랑의 지극한 정성과 나라안이 평안하게 지내기를 원하는 마음을 높이 앙모하여 군내에 있는 높은 학자들이 날마다 찾아와서 성리학을 토론하기도 하였다.

여러 학자들이 정자 이름을 망북정(望北亭)이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공이 날마다 이 정자에 나와서 애국충정으로 북쪽을 향하여 4배를 한다는 뜻이다.

또 효성이 지극하여 집에 있을 때에는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였다. 부친은 장예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로 있었고 모친은 고성 이씨(固城李氏)이다. 언제나 부모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드리고 좋아하는 음식은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에 많은 애를 썼다. 군내 여러 유림들은 감탄하였다.

이런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망북정에 나와서 배우기를 청하는 후학들이 매우 많았다. 오기만 하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정성껏 교육에 힘을 썼다. 모인 사람들은 실력의 차가 심하여 여러 분단을 만들어서 교육을 해야만 했다. 몇 해를 두고 열심히 교육을 하였기에 제자들의 실력은 날로 진보되었다.

제자들 중에는 학자로서 이름이 있는 사람도 여러 명이 있었다. 공의 여생은 후학들을 잘 가르치어 유교의 도의를 지키고 경학을 연구하는 데에 낙을 삼았다. 여러 제자들은 공의 아름다운 덕행에 감화되어 인심이 순후하여지고 향리의 풍속이 아름답게 되었고 모두들 이 곳을 군자지향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공은 이 정자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을 교육하는 데에 취미를 붙이면서 여생을 보냈다. 이리로 내려온 뒤부터는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부당하게 생각하고 마음조차 두지 않았다. 나라안의 형편이 당파 관계로 어지럽게 되었으니 불의에는 참여하지 않는 굳은 마음은 일평생 변하지 않았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