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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면 국사리 박동명장군묘소(玉山面 國仕里 朴東命將軍墓所) 본문

통합청주시/흥덕구(興德區)

옥산면 국사리 박동명장군묘소(玉山面 國仕里 朴東命將軍墓所)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0. 10. 20. 11:06

몽단이고개에 의마총을 보고 의마총이 자리한 산의 능선을 타고 오르면 박동명장군의 무덤을 볼수가 있습니다.의마총에서 걸어서 오르면 바로 만날수 있습니다.비석과 함께 문인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박동명장군의 무덤은 시신이 없고 옷을 묻어 묘지를 만든 무덤입니다.

박동명의 무덤과 의마총이 위치한 고개를 접지고개라고 합니다. 접지고개는 옥산면 국사리에 있는 고개입니다. 이 곳에는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박동명(朴東命)의 혼이 고개를 넘다 갑자기 사라졌을 때 박동명은 강서면 항각골에서 잠을 자고 있던 아들 홍원에게 현몽하여, “내가 고개를 넘지 못하고 구천으로 올라갔으니 내 옷을 거두어 고개에 무덤을 마련토록 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홍원은 솔가하여 장남령을 향해 떠났고, 이 때 휘하장수 김득성은 장군의 혼이 끊어지자 통곡하며 매은이 타고 있던 말을 끌고 왔는데, 이 말 역시 골짜기에 이르자 발굽이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말굽이 붙었던 고개라 해서 이 곳을 ‘접지고개’ 혹은 ‘접지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 그 곳에 말의 봉분을 만드니 ‘의마총’이라 하여 전해지고 있다.

 

박동명의 묘지밑에 있는 의마총의 모습입니다.

 

박동명은 조선 중기 청주지역의 의병장·충신.

본관은 순천(順天)이고, 자는 시응(時應)이며, 호는 매은당(梅隱堂)이다. 교리공(校理公) 박인년(朴引年)의 후손으로 흥덕구 강서동 출신이다. 아버지는 임진왜란 때 청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조헌(趙憲)[1544~1592], 영규대사(靈圭大師)[?~1592]와 함께 청주성 탈환에 공을 세운 민양공(愍襄公) 박춘무(朴春茂)[1544~1611]이고, 할아버지는 박기정(朴箕精)이다. 아들 박홍원(朴弘遠)[1606~?]도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임진왜란 때에 아버지를 따라 의병의 선봉에 서서 청주성 탈환에 공을 세웠다. 1599년(선조 32)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태안군수와 제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괄의 난 때는 병으로 직접 출전하지 못하게 되자 아들 박홍원으로 하여금 대신 의병을 이끌고 참전케 하였다. 병자호란 때는 62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직접 의병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달려가 왕을 호종(扈從)하였으며, 청군의 공격을 받아 분전하다가 광주(廣州)의 무계(茂溪)에서 중과부적으로 패배하고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그 뒤 1709년(숙종 35)에 그의 충용(忠勇)을 가상히 여겨 고향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고, 공조판서를 추증하였다. 시호는 충경공(忠景)이다. 흥덕구 강서동 주봉마을의 민충사(愍忠祠)에 제향되어 있다.

주봉마을에 있는 박동명의 충신각입니다
주봉마을에 있는 민충사입니다.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 접지골[接趾谷]에 있다.
아버지와 아들 3대가 창의(倡義)한 청주지역 순천박씨(順天朴氏)의 대표적인 현조(顯祖)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