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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면 장재리 말티재(長安面 壯才里 말티재) 본문
보은군 장안면 장재리에 있는 고개입니다. 말티고개(말티재, 馬峙, 薄石峴, 馬峴礴石)는 장재리에서 갈목리로 가는 고개로 옛날에 세조대왕이 말을 타고 지나갔다고 하여 박석티라고도 하는데, 세조대왕이 고개를 넘을 때, 돌을 깔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해발 800미터의 꼬불꼬불 열두굽이나 되는 가파른 고갯길을 말티고개라 부른다. 속리산의 관문이라 하는 이 고개는 처음 고려 태조대왕께서 속리산에 올 때, 닭은 길이라 하며 또 조선 세조대왕께서 올 때 얇은 돌을 깔았다고 하는데 1966년 도로 포장 공사를 할 때 옛날의 흔적이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또 다른 이름으로 “박석재”라고도 부른다.
세조대왕께서 속리산에 오실 때 장안면 장재리에서 고갯길을 연으로 넘을 수 없어 말을 타고 고개를 넘고 나서 갈목리 고개 밑 부락에서부터 다시 연을 바꾸어 탔다고 하여 “말티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1966년 말티재를 포장한 후, 이를 기념하는 비를 세웠다.
말티재 전망대가 만들어 지면서 말티재정상에는 주차장시설등을 구비하는 등 편의시설을 갖추어 놓았습니다. 단풍철인 요즈음 말티고개에서 바라보는 속리산의 기을 풍경이 좋습니다.
말티고개, 일제에 대한 저항의 역사도 간직 - 충북과 나의 연결고리 '충북일보' (inews365.com)
옛날 독점에 한 효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지성으로 어머니를 모시는대도 어머니는 시름 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생명이 경각에 이르게 되었다. 어머니 곁에서 뜬 눈으로 병구환을 하던 아들은 그만 깜빡 잠이 들고 말았는데, 꿈에 신령이 나타나 내일 아침 말티고개 밑에 가면 한 중이 지나갈 것이니, 그를 붙잡고 어머니를 살려달라 사정하라는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 그가 말티고개 밑에 이르니 바랑을 짊어지고 막 고개를 오르려고 하고 있었다.
효자는 그 중의팔을 붙잡고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그 중은 그의 청을 들은척도 않고 손을 뿌리치고 길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이 때 어떻게 세게 중의 팔을 잡았는지 중의 팔이 떨어지게 되었다 팔이 떨어진 중은 허우적거리며 고개를 오르다 지쳤는지 짊어지고 있던 바랑을 벗어 던지고 피를 흘리며 쓰러져 죽고 말았다.
효자는 한동안 넋을 잃고 중을 바라보고 있다가 그가 잡고 있던 중의 팔을 내려다 보니 이것은 사람의 팔이 아니라 산삼이었다. 기쁜 나머지 단숨에 집으로 달려와 그 산삼을 달여 어머니께 드렸더니 병은 씻은 듯이 낫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중이 바랑을 벗어 놓은 골짜기를 “바랑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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