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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초홍명희문학비(碧初洪命憙文學碑)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괴산군(槐山郡)

벽초홍명희문학비(碧初洪命憙文學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0. 10. 26. 07:24

 

 

 

 

 

 

 

 

 

괴산 제월리 제월대주차장에 자리하고 있다
월북작가라는 꼬리표 때문에 그동안 금기시 되여왔다
괴산에서는 임꺽정을 모델로 하여 고추등 여러가지 상표로 사용하고 있다
 
아버지 범식(範植)과 어머니 윤씨 사이의 4남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문을 배웠으며 1905년 중교의숙을 졸업했다. 1906년 도쿄[東京] 다이세이 중학[大成中學]에 입학하여 이광수·최남선 등과 사귀었는데, 이후 이들은 '조선 3재(三才)'로 불렸다. 한일합병 때 금산군수였던 아버지가 자결한 뒤 귀국하여 민족문제에 눈뜨기 시작했다. 1913년 만주, 베이징[北京] 등지를 방랑했으며 이후 충청북도 괴산에서 3·1운동을 주동하여 투옥, 옥고를 치렀다. 1923년 신사상연구회 및 그 후신인 화요회(火曜會)에 참여했으며, 한때 동아일보사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1927년 시대일보사 사장으로 있으면서 신간회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오산학교 교장, 연희전문학교·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1930년 신간회 주최 제1차 민중대회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8·15해방 후 좌익운동에 가담하여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추대되었고, 1947년 민주독립당 위원장에 오른 뒤 이듬해 민주독립당을 이끌고 월북했다.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했고, 남한의 정세가 악화되자 월남하지 않고 그대로 북한에 남았다. 북한에서 남한 출신으로서는 드물게 1차례의 정치적 위기도 없이 최고위직을 두루 역임했다. 1948년부터 1962년까지 김일성이 수상을 맡은 북한 초대 내각의 부수상을 지냈으며 이어서 1968년 사망할 때까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과학원(지금의 사회과학원) 원장과 학계의 최고 원로라 할 박사보다 상급인 원사 등을 역임했다. 그의 사후에는 장남 홍기문이 조국평화통일위원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상설위원회 부위원장 등 중책을 계승했으며 손자 홍석형이 부총리 겸 국가계획위원장, 홍석중이 조선작가동맹 소속 소설가로 활동하는 등 자손들까지 후광이 계속되었다.
그의 사상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은데, 대체로 마르크스주의자보다 사회주의에 공명하는 진보적 민족주의자로 평가된다. 그가 공산주의자와 비타협적이었던 신간회의 핵심간사로 활동했던 것은 그의 사상이 양자를 아우를 수 있는 민족주의에 기반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관철하는 방법으로, 적극적인 정치투쟁이나 무장투쟁이 아니라 신간회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활동과 문필활동을 선택했으며, 이러한 경향은 8·15해방 이후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북한에서도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남한 출신의 중간파 인사로서 민족통일전선의 상징으로서 중용되었던 것이다. 그의 유일한 소설인 〈임꺽정〉은 조선 명종 때의 도적 임꺽정을 소재로 한 대하 역사소설이다. 처음에는 〈임거정전〉이란 이름으로 발표했는데, 1928년 〈조선일보〉에 처음 연재한 이래 여러 차례 중단되었다가 미완의 상태로 머물고 말았다. 봉단(鳳丹)·피장(皮匠)·양반·의형제·화적 등 5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특히 민중의 풍속과 언어에 지대한 관심을 보여 연재가 시작되자 각계각층의 찬사를 받았다. 황석영의 〈장길산〉이나 김주영의 〈객주〉는 이 작품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평론으로 〈신흥문예의 운동〉(문예운동, 1926. 1)·〈대(大)톨스토이의 인물과 작품〉(조선일보, 1935. 11. 23~12. 4)·〈언문소설과 명청소설(明淸小說)의 관계〉(조선일보, 1939. 1. 1) 등을 발표했다. 수필집으로 〈학창산화 學窓散華〉(1926)가 있다. 1985년 남한에서 〈임거정〉(9권)이 재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