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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내북면 이원리 홍우선,윤정훈송덕비(內北面 泥院里 洪雨先,尹鼎勳頌德碑) 본문
윤정훈(尹鼎勳)은 1881. 11. 24.~1921. 7. 7. │ 자(字)는 옥현(玉鉉), 호(號)는 국은(菊隱)으로 내북면(內北面) 서지리(西枝里) 168-6번지(현 터골길 33)에 거주하였다. 고종의 국장 장례에 내북면 서지리 대표로 상경하여 참례하고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3・1운동을 직접 목격하였다. 이후 3・ 1운동은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보은지역에서는 4월에 이르러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4월 8일에 보은지역에 최대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내북면 서지리(西枝里, 터골길)에서 윤정훈(尹鼎勳)과 구열조(具悅祖), 산성리(山城里, 현 보은읍 산성리 잣미길)에서 이용기(李龍基)가 각각 마을 주민들을 이끌고 산 위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보은지역에서 4월 초 이래로 일제의 탄압으로 독립만세를 부르지 못하였던 상황에서 자신의 거주지인 서지리 마을 주민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고자 결심하였다. 이에 마을의 이름 없는 산에 올라 윤홍훈(尹 洪勳) 등 주민 8명에게 조선 독립에 관한 연설을 하고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4월 8일 밤 김성복(金聖福), 김수려(金秀麗) 등 마을 주민 12명이 모였다. 이 들은 함께 마을의 성산 300여 미터 고지에 올라가서 2시간 동안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이후 체포되어 일경들의 잔혹한 탄압을 받고 청주 검사국으로 송치되어서 신문을 받은 과정에서 갖은 고초를 겪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홍우선은 서기 1884년 8월 22일 본면 도원리에서 출생하였는데 젊어서 부터 강개한 뜻을 품었고 용력이 또한 사람에 뛰어 났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이루어지자 공은 통분함을 참지 못하여 수십명의 의병을 모아 청주 한봉수대장에 그 아장이 되어 도촌방방곡곡에서 불철주야 왜적을 무찌르는데 분투 하였으니 그 실례로서 1907년 진천군 문백에서 왜 헌병대위 도각선치를 사살한것을 비롯하여 같은해 괴산군 유목리 부근에서 왜병 10여명 전멸과 다수 무기를 노획 청주 양성면 추정리에서 또한 적 10여명 사살과 무기노획 북일면 세교리에서 5명 사살 문의면 성남리에서 20여명 사살 또 다시 초정리에서 적수송대를 급습 물자및 현금을 탈취하여 주민들에게 분급하는 한편 아군수용에 충당하였으며 내원면 옥화대에서 8명 사살과 무기노획 또 그 다음해 청주 전의 본천 평택 여주 홍성 각지에서의 격전 그리고 문경에서의 최대승첩등 전후 불가승기의 그 전투는 의병전사사실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웠던 것이다.그러나 다만 죽창대 총포 또 중과부적의 형세로 도저히 더 전투를 지속하기 어렵게 되매 잠시 속리산에 후퇴하여 다음기회를 기다리고 있다가 1936년 6월 22일 고향인 도원리에서 비원을 안은채 서거하고 말았으니 아 슬프다 이것이야 말로 장사영웅 누만금의 원통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큰집이 기울어 지는데 한개의 나무로는 지탱하지 못함과 같이 아무리 공의 전륜이 용력이 불타는 충의심이라 할지라도 힘의 부족과 시운의 불리에는 어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빛나는 충훈과 불명의 무훈만이 길이 천추에 남아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또 이 강토의 수호신이 되실것을 확신하며 본회로서 뒤늦게 나마 자그마한 돌에다가 그 위적을 새기는 바이다 강한 바람앞에 센풀을 알고 어지러운 때에 충신을 보게 된다는 옛말을 우리는 새삼 공에게서 절실히 느끼고 있는 것이다. 서기 1973년 8월 18일 내북애향동지회 세움. 글 이병한 글씨 김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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