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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이면 신기리 오영전기념비(北二面 新基里 吳永田記念碑) 본문

통합청주시/청원구(淸原區)

북이면 신기리 오영전기념비(北二面 新基里 吳永田記念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1. 9. 10. 06:11

 

 

오영전(吳永田, 1866년 음력 12월 13일 ~ 1938)은 대한제국일제 강점기 초기의 관료이다. 출신지는 원적지인 충청북도 청주군 낭성면 삼산리 출신이다.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어릴 때는 한문을 수학했고, 한성부의 사립학교인 동아학관 법률경제과를 거친 뒤 1905년에 관리를 뽑는 문관전고시험에 합격하였다.

1905년에 농상공부 주사로 임명되면서 관리 생활을 시작하였다. 농상공부 서기랑과 존봉도감 감조관 등을 지냈다. 한일 병합 조약으로 조선총독부 체제가 출범하면서 충청북도 문의군 군수로 임명되어 재직했다. 문의군수로 재직 중이던 1913년에 정8위에 서위되어 있었다.

1914년의 대규모 인사 개편 때 문의군수직에서 면직되어, 총독부 관리로 오래 근무하지는 않았다. 퇴관 후에는 청주군 북이면에서 북이면장을 오래 역임하였고, 현 청원군 내수읍을 중심으로 조직된 내수금융조합의 조합장도 맡아 이 지역의 유지로 활동했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관료 부문에 포함되었다

 

 

종칠위오공영전기념비’(從七位吳公永田記念碑)라고 적혀있습니다. 풀이하면 ’종7위에 오른 오영전 공의 기념비‘가 됩니다.뒷면에는 그의 행적을 기록한 비문이 남아있습니다.  오영전의 비석의 건립시기는 소화15년(1940년)입니다.건립주체는 북이면민일동으로 세웠습니다. 비석은 북이면사무소내 육이오 참전용사기념탑 뒷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조선인 관리가 최상위에 오를 수 있는 자리는 대체로 고등관(지금의 사무관에 해당한다)인 군수였다.(중략) 고등관이 되기만 하면 그 아래인 ‘판임관 관료’가 아무리 나이가 많더라도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지 않을 수 없으며, 모든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일거에 보장되었다. 고등관과 판임관의 구별은 매우 엄격해 고등관은 ‘사족’ 취급을 받았고, 판임관은 일반 평민과 신분상으로는 차이가 없었다. 고등관은 기차를 타더라도 3등칸이 아니라 2등칸 이상을 탔으며, 고등관의 부인은 ‘옥상’이란 일본 칭호가 붙었고, 판임관의 부인은 ‘오카미상’으로 불렸다. 한마디로 특권층이었다. 군수를 포함한 조선인 고등관이야말로 지위나 직무상 일제가 조선을 식민통치하는 데 핵심적으로 가담한 부류였으며, 이들의 협력 없이 일제의 식민통치는 불가능했다.”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 경향신문 2010.815 / 기사제목 : 부끄러운 역사 친일 ‘미완의 청산’)

1914년 2월 28일자 조선총독부관보에 따르면 오영전은 1914년 3월 5일부로 군수직에서 면직됩니다.

하지만 이후 1919년부터 1931년까지 충청북도 청주군 북이면장을 수행합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언론보도에 따르면 일본의 제천절에 해당하는 기원절에 표창을 받기도 합니다. 또 1927년부터 1933년여 까지 내수금융조합장을 지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