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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읍 교동리 옥천향교(沃川邑 校洞里 沃川鄕校)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옥천군(沃川郡)

옥천읍 교동리 옥천향교(沃川邑 校洞里 沃川鄕校)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1. 10. 14. 06:34

 

 

1398년(태조 7)에 창건하였고, 1442년 세종 24년에 송을개宋乙開 옥천군수가 향교 남쪽에 9칸의 명륜당을 건립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중에 불탄 것을 그 뒤에 다시 세웠다. 1954년에 유림총회에서 황폐한 향교 재건을 결의하고 1961년에 복원하였으며, 1966년과 1974년에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옥천 읍내 중심부에서 조금 떨어진 마성산 현무봉 줄기에 자리하고 있다. 향교 동구에는 홍살문이 놓여 진입할 때에 경건함을 일깨운다

 

 

 

 

향교가 있는 곳은 책임자인 전교를 비롯해서 향교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마을을 이룬다. 교동리라는 지명 또한 향교에서 유래한 것으로 읍내 마을과는 구분되는 또 하나의 거주 영역을 구성하고 있다. 옥천향교도 대부분의 지방 도시의 경우처럼 외곽에 자리하고 있는데 그 지세가 약간 경사져 있다. 이럴 경우 경사진 뒤쪽의 높은 곳에 명륜당을 지어 문묘를 내려다 보이도록 하 는 것은 아무래도 격식에 맞지 않는다. 이러한 경사진 지세는 향교 건물 배치에 영향을 주 었다

 

 

 

 

또 도성처럼 왕이 직접 문묘 향사에 참여하는 경우라면 대성전이 앞에 놓이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지방의 문묘 향사는 자주 치르는 것도 아니므로 굳이 앞부분에 대성전을 둘 필요도 없다. 이런 사정들이 복합되면서 향교의 건물 배치는 점차 대성전이 뒤에 놓이는 형식으로 자리 잡아 갔다. 옥천향교의 건물 배치는 교육 공간인 명륜당이 앞에 놓이고 뒤에 대성전을 비롯한 제사 공간을 두는 전학후묘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명륜당이 맨 앞에 있고 다음으로 서쪽에 서재와 동편에 고직사庫直舍가 있다.

 

 

 

 

명륜당과 대성전 사이에는 유생들이 기거하는 동·서재가 있었다. 현재 동재는 헐리고 바로 뒤에 고직사만 있다. 맞은편에 위치한 서재 홍도당弘道堂은 4칸 팔작지붕의 단층 기와집이다

 

 

 

 

내삼문을 통하여 들어가면 대성전과 양 옆에 동무·서무가 있다. 대성전은 정면 3칸 맞 배지붕 형태의 단층 기와집이다. 그 안에 공자를 주향으로 모시고, 양편에 사성四聖과 공 자의 열 제자인 십철十哲을 비롯하여 육현六賢중 주희와 정이를 배향하였다. 대성전의 양 옆에는 작은 3칸 맞배지붕 형태의 단층 기와집이 똑같은 형태로 동쪽과 서쪽으로 배치되어 있다. 우리나라 유학의 발전에 공헌한 십팔현十八賢을 제사하기 위하여 지은 행랑으로 이것을 동무·서무, 즉 양무라 한다. 한국의 대유학자 조헌, 송시열 등 동국 18현도 현재 대성전에 위패가 모셔져 제향을 올린다.

 

 

 

 

조선시대에는 『경국대전』의 규정에 의하여 종6품의 교수와 정9품의 훈도를 두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며, 국가로부터 5∼7결의 학전과 전적·노비를 지급받아 거기서 나오는 수익으로 유지 비용을 충당했다. 소장도서는 판본 15종 58책, 사본 11종 26책이 있으며, 이 중 『유안儒案』·『청금록靑襟 錄』·『청금속록靑襟續錄』·『선안仙案』·『교안校案』·『향교중수사실鄕校重修事實』 등은 조선 후기 향교연구와 이 고장 향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현재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 명 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전면에 위치한 건물은 교육 공간인 명륜당으로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형태 의 2층 누각이다. 조선 후기에 오면서 대부분의 향교에 누각이 세워진다. 누각은 한여름 더위를 피하는데 쓰이기도 하지만 주로 향교에 속한 사람들의 모임이나 휴식 그리고 외부 손님의 접대 장소로 이용되었다. 아래층 중앙은 향교를 출입하는 문이고 위층은 누각으로 꾸며 단조롭고 평범한 향교의 공간 구성에 변화와 율동감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