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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곡리 효부최익희여사효행비(射谷里 孝婦崔翼姬女史孝行碑)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증평군(曾坪郡)

사곡리 효부최익희여사효행비(射谷里 孝婦崔翼姬女史孝行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2. 9. 30. 08:05

 

사곡3리(射谷三里) : ㆍ방곡(芳谷) : ‘궁전’에서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호구총수』(1789)에 ‘방곡리(芳谷里)’란 기록이 보인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의 ‘방곡(芳谷)’으로 불리던 곳이다. 이 마을을 ‘방골’로는 부르지 않지만, ‘방곡’은 대부분 ‘방골’과 대응된다. ‘방골’은 ‘방’과 ‘골’로 나뉘며, ‘방같이 아늑한 마을’로 풀이된다. 실제로 이 마을은 삼태기 속에 들어앉은 형상으로, 앞쪽[남쪽]만 트이고 삼면이 막혀 있다. 따라서 매우 아늑한 느낌을 준다. ㆍ안골뱅이골[-房-]/작은방곡(-芳谷) : ‘방곡’ 남쪽에 있는 ‘사곡교회’ 일대를 일컫는다. 교회 외에 1가구가 거주한다. ‘안골뱅이골’은 ‘안골방이골’의 ‘이모음역행동화’ 어형이다. ‘골방이골’은 ‘골방이’와 ‘골’로 나뉘고, ‘골방이’는 ‘골방’에 접미사 ‘이’가 붙은 어형이다. ‘골방’은 ‘큰방 뒤쪽에 딸린 작은 방’을 뜻하니, ‘안골뱅이골’은 ‘안쪽 골방과 같은 골짜기, 즉 큰 골짜기의 뒤쪽에 딸린 작은 골짜기’로 풀이된다. 달리 ‘작은방곡’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방곡에 비해 규모가 작기 때문이다. 벼락배골 : ‘안골뱅이골’ 북쪽으로, 버스승차장 인근을 가리킨다. ‘벼락배골’은 ‘벼락배’와 ‘골’로, ‘벼락배’는 다시 ‘벼락’과 ‘배’로 나뉜다. ‘배’는 ‘바위’의 방언형이다. 지명에서 ‘벼랑’은 매우 다양하게 실현된다. ㉠ ‘바람’으로 나타나기도 하니, ‘바람고지’ㆍ‘바람골’ㆍ‘바람들’ㆍ‘바람말’ㆍ‘바람모팅이’ㆍ‘바람바우’ㆍ‘바람실’ㆍ‘바람재’ 등이 그 예이다. ㉡ ‘바랑’으로 나타나기도 하니, ‘바랑골’ㆍ‘바랑끝’ㆍ‘바랑날’ㆍ‘바랑들’ㆍ‘바랑말’ㆍ‘바랑메’ㆍ‘바랑바구’ㆍ‘바랑배미’ 등이 그 예이다. ㉢ ‘벼루’로 나타나기도 하니, ‘벼루고개’ㆍ‘벼루들’ㆍ‘벼루말’ㆍ‘벼루모탱이’ㆍ‘벼루배미’ㆍ‘벼루재’ 등이 그 예이다. ㉣ ‘벼락’이나 ‘베락’으로 나타나기도 하니, ‘벼락산’ㆍ‘벼락고개’ㆍ‘벼락골’ㆍ‘벼락바위’ㆍ‘벼락배미’ㆍ‘베락골’ㆍ‘베락매’ㆍ‘베락바우’ 등이 그 예이다. ㉤ ‘비럭’으로 나타나기도 하니, ‘비럭골’ㆍ‘비럭굴’ㆍ‘비럭동’ㆍ‘비럭뜸’ㆍ‘비럭바구’ㆍ‘비럭보’ㆍ‘비럭재’ 등이 그 예이다. ㉥ 이밖에’ㆍ‘베루’ㆍ‘베리’ㆍ‘비링이’ 등으로 나타나기도 하니, ‘베루골’ㆍ‘배루들’ㆍ‘베루메’ㆍ‘베루모퉁이’, ‘베리끝’ㆍ‘베리미’ㆍ‘베리바우’ㆍ‘베리산’ㆍ‘베리재’ㆍ‘비링이들’ 등이 그 예이다. 본 예 ‘벼락배골’은 ‘벼랑 바위가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방골입구에 있는 최익희여사의 효행비입니다.

 

사곡3리 방골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최익희여사의 효행비입니다. 효행비석 전면에는 효부최익희여사효행비라고 한글로 적혀있으며 비석의 후면에는 최익희여사의 효행기록이 적혀있습니다. 효행비석 옆에는 성균관으로 부터 받은 표창장의 모사본이 같이 있습니다.

 

 

최익희여사는 전주인이다. 어린시절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특히나 부모님을 향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남편 연규옥과 결혼하여 자식들을 모두 잘 키웠으며 특히 불우한 이웃들을 보게되면 자신의 일인냥 많은것을 베풀었다. 연규옥과 사이에 2남3녀를 두었고 임신9개월의 무거운 몸이었을 때 시부가 돌아가시니 그에 충격을 받은 시모가 자리에 눈게되자 병의원은 물론 병에 좋다는 많은 약재를 구하여 시탕하였다.그러나 지극 정성에도 불구하고 1968년부터는 시모가 혼수상태에 이르게 되니 자신의 손가락을 물어 시모에게 단지주혈하였으며 대소변은 물론이려니와 지극한 간호를 하였다. 최익희여사의 효행이 원근에 자자하여 증평군수를 비롯 청안향교등의 표창장과 함께 1991년 2월에는 성균관에서 주는 표창장을 받게되었다. 이에 가문의 영광과 더불어 최익희여사의 효행을 널리 알리고자 이 효행비를 마을입구에 세웠다. 비석의 건립시기는 2001년4월5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