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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문화재단지 관찰사조득림영세불망비(文義文化財團地 觀察使趙得林永世不忘碑) 본문

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문의문화재단지 관찰사조득림영세불망비(文義文化財團地 觀察使趙得林永世不忘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2. 11. 22. 00:09

 
 
조득림은 조선후기 홍문관제학, 예문관제학, 공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덕경(德卿). 조제만(趙濟晩)의 아들이다. 1831년(순조 31) 진사로서 식년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1837년(헌종 3) 부교리를 지냈다. 그 뒤 영변부사를 거쳐 1846년 평안도암행어사 박영보(朴永甫)의 서계에 의하여 부사로서의 실정이 인정되어 치죄되었다.
1848년에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되었고 1853년(철종 4)에는 호군으로 종묘친제시(宗廟親祭時) 독옥책관(讀玉冊官)이 되었다. 1855년 형조판서·대호군이 되었고, 동지사의 정사로 청나라에도 다녀왔다. 이듬해 한성부판윤을 거쳐 공조판서를 지내고 대호군으로서 산릉도감(山陵都監)의 당상에 임명되었다.
1858년 판의금부사가 된 이후 고종대까지 걸쳐 여러 차례 이 직위를 중임하였고, 이어 1861년에는 예조와 형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삼정(三政)의 문란과 관리의 탐학에 대한 반발로 민란이 발생하자, 박규수(朴珪壽)의 건의로 이정청(釐整廳)이 설치되었는데, 이때 상호군으로서 당상에 임명되어 삼정개혁에 힘썼다.
철종 사후에는 국장도감(國葬都監)에서 표석음기서사관(表石陰記書寫官)을 맡았고, 고종 즉위 후 공조판서·이조판서·한성부판윤·홍문관제학 등 요직을 역임하면서, 실록사(實錄事)로 실록편찬에도 참가하였다. 1866년에는 예문관제학으로 고종이 대사면령을 내렸을 때 반포한 교문(敎文)을 제술하였고, 이해 형조판서 및 공조판서를 지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조득림(趙得林))]
 
 
 
 
승정원일기 2479책 (탈초본 121책) 헌종 14년 11월 21일 신묘 19/19 기사 1848년  道光(淸/宣宗) 28년

○ 忠淸監司趙得林疏曰, 伏以臣, 庸闇無肖之一凡品耳, 遭値聖明, 過蒙拔擢, 跡其歇歷, 罔非踰濫, 考諸試效, 一無稱塞, 每自循省, 若隕淵谷, 不意今者, 伏奉除旨, 以臣爲忠淸道觀察使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