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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인면 부수리 돌탑(懷仁面 富壽里 돌탑)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보은군(報恩郡)

회인면 부수리 돌탑(懷仁面 富壽里 돌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3. 2. 13. 10:32

 

 

회인면 부수3리 입구에 있는 돌탑입니다. 마을입구에 있습니다. 근간에 새로 세운 듯 합니다.

 

돌탑은 마을로 들어오는 액이나 질병, 살(煞), 호환(虎患), 화기(火氣) 등을 막기 위해 쌓은 신앙 대상물이다. 하지만 마을 앞의 허한 방위를 막기 위해서나 특정한 모양의 지형을 보완하기 위해 쌓은 단순 비보물(裨補物)이기도 하다. 다른 신앙 대상물에 비해 풍수적인 비보(裨補)신앙의 모습을 가장 강하게 지니고 있다. 그러나 고갯마루나 사찰입구에 지나가는 길손이 마구잡이로 던져 놓은 잡석의 서낭당이나 개인이 신을 향한 구도의 마음으로 쌓은 돌탑과는 구별된다. 주민들의 소망과 정성이 모아진 비교적 정교한 마을신앙 대상물이기 때문이다.

돌탑은 돌이 지닌 영구불변성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종교 원리를 이용한 신앙 대상물이다. 돌이 지닌 주술성을 토대로 주민들이 하나씩 정성껏 쌓아 올린다. 개인의 창작물이 아니라 주민공동체의 발원 속에서 만들어진 원초적 신앙의 산물이다. 돌탑은 원뿔형, 원추형, 원통형, 반원형 등으로 정성스레 쌓는다.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인 돌탑은 주민들의 정성으로 정교하게 탄생한다. 이 가운데 원뿔대형이 가장 많다.

 

 

부수리는 본래 회인군 읍내면 지역으로 1914년 교동,종산리,지산리,평창리,사동,눌곡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부수리"라 하고 보은군 회인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 바깥모산(地山) : 안모산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큰 연못이 있었는데 그 바깥쪽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 안모산(種山) : 부수리에서 으뜸되는 마을 큰 못의 안에 있음 북처럼 생긴 산이 있어 "종산이"라고도 한다.
  • 바락고개(發花恃) : 안모산 서쪽에 있는 마을 바락고개에 있다.
  • 숲거리 : 바깥모산 서쪽에 있는 마을로 숲이 많았다고 한다.
  • 우무실 : 향교골 남쪽에 있는 마을 소없이 농사를 지어도 과일이 많아 먹을 것이 많아서 우무실이라 한다고 한다.
  • 향교골(행교말, 校洞) : 안모산 서쪽에 있는 마을로 회인향교(懷仁鄕校)가 있다.

 

부수리에는 탑사리들이라는 지명이 있습니다.

 

보은군 회인면 부수리 향교골에 탑사리들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이곳이 홍정승의 집터였다고 한다.
흥정승이란 조선 예종 때 영의정 홍윤성을 말한다.
횽윤성은 조선 5백년을 통하여 가장 파격적으로 살다간 사람이다. 파격적으로 살았다는 것은 인간의 활동을 규제하기 위한 도덕,법률 등에 구애받지 않고 하고싶은 대로 하고살았다는 것이고,그가 그와 같이 살수 있었던 것은 임금이 보장해 준 것이다. 그의 파격적인 행동은 그가 권력을 잡기 이전부터 그런 소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과거를 보려고 서울을 오르내릴 때는 한강을 건너야 한다. 그가 한강에 이르렀을 때 수양대군이 제천정에 나와 놀고 있었다. 대군이 나와 놀고 있으므로 그의 종들이 수십 명씩 배에 올라타 손님을 내쫓고 뱃길을 돌리게 하여 배통행을 금지시키고 있었다.
홍윤성이 타고 있던 배에는 이 대군의 종들이 올라와 법석을 떨었다. 이에 홍윤성은 삿대를 꺽어 그 종들을 닥치는대로 쳐서 한강물속에 풍덩풍덩 던져버리곤 혼자서 유유히 배를 저히 강을 건넜다. 수양대군이 정자에서 이 꼴을 보고 그 시골 선비를 불렀다. 그리고 그의 비범함을 눈여겨 두었던 것이다.
영리한 수양대군은 이 일에서 자신의 쿠데타에 이 비범한 그의 힘을 최대한 이용하였다. 그를 행동대로 썼던 것이다. 김종서를 죽이던 날 저녁에 먼저 당시 훈련원 주부(지금의 훈련소의 계획장교)로 있던 홍윤성은 공사를 보고 한다는 구실로 김종서의 집에 먼저 가서 동정을 살폈다. 김종서는 당시 힘이 세다고 소문난 그를 불러들여 자기의 활 가운데 튼튼한 활을 골라 당겨보라 하였다.홍윤성은 그 강궁을 당겨 거듭 두 개를 모두 꺽어 버리니 김종서가 크게 칭찬하고 그의 첩에게 큰 그릇에 술을 부어주게 하니 세 사발을 마시고 돌아갔다. 세조임금이 신하들에게 술 먹기 시합을 시킬 때 으뜸한 것도 그였다.
세조 임금은 그에게 고래같이마신다 하여 경음당 이란 호를 지어주고 그별호를 새긴 인장을 주었는데 홍윤성은이 호를 평생토록 즐겨 썼다고 한다.그는 치부하는 데도 파격적이었다.다른 고관들이 숨어서 몰레 치부한 데 비하여 그는 공개적으로 뇌물을받았다.그의 집앞에는 뇌물을 가져오는 심부름꾼과 말,수레,가마꾼을 위해 문밖에다 솥을 건 집을 수십채나 지어 두었다. 그의 호화주택에 세조는 경해라는 익살스럽운 집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그는"경해 속으 경음당"이라고 무척 자랑하고살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파격적으로 살다 간 그의 삶은 어느 면에서 매력이 있다.
그는 1425년에 당시 회인현이었던 회인면 부수리에서 태어났다.집이 가난하고 조실부모하여 숙부에게서 자랐다.1450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갔다.1453년에 수양대군을 도와 김종서를 제거하는데 공을 세워 정난공신 2등이 되었고 1455년 세조가 임금이 되자 좌익공신 3등에 인산군에봉해졌다.1467년에 우의정이 되었고 이듬해 세조 임금이 죽자 신숙주,한명회 등과 원상(다음임금이 즉위 할때까지 국사를 처리하는 정승)이 되었다.1469년에 좌의정이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 마침내 영의정에 올랐다.1470년에 부원군에 봉해지고 이듬에 성종 임금 즉위에 세운 공으로좌리공신 1등이 되었다.그의 처음이름은 우성이었고 자는 수응이었다.위평리라 시호되었다.부수리 탑사리들은 홍정승이 태어나서 자란 옛집이 있었던 터라고 전해지고 있다.[회인면사무소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