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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내동 조선식산은행충주지점(城內洞 朝鮮殖産銀行忠州支店) 본문
충주가 고향이신분들은 이 자리를 한일은행자리로 기억하실겁니다.
식산은행은 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 설립된 최초 금융기관이다.
농공은행은 1906년 농업과 공업의 개량 발달을 위해 설립된 은행이다. 당시 정부에서는 지방 금융의 핍박을 우려하여 전국 주요 도시에 정부 창고를 건설하고 미곡의 담보 대부, 부동산의 담보 대부를 행하였다. 그러나 그 시설이 응급적·과도적인 것에 불과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부 자원도 빈약하여 지방 금융을 완화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없었다. 이에 정부는 1906년 3월 「농공은행조례(農工銀行條例)」를 공포하여 농공은행을 설립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다.지방 산업의 발전과 금융 유통을 활성화시키기 위하여 각 관찰도(觀察道) 단위를 영업 구역으로 하는 농공은행을 설립하였다.
1906년 3월 정부에서 농공은행 조례를 발표하자 이에 의거, 그 해 9월 자본금 10만 원으로 충주농공은행을 설립하였다. 그 후 경제와 교통 관계상 한성·공주·충주의 3개 은행이 병합하여 1907년 6월 주식회사 한호농공은행 충주지점이 되었다. 당시 산업상태가 유치하고 농공자금의 용도가 미미하여 업무가 축소되자 1908년 9월에 한호농공은행 충주출장소로 격하되었다.
1910년 강제로 한일합방이 되면서 일반적인 경제 상황은 진보화의 경향을 띄게 된다. 동시에 일본인이 이주하여 기업을 설립하자 구매력이 확대되고, 이에 따라 1912년 8월 영업소의 건물을 신축하게 되고, 1914년 다시 지점으로 복구되었다. 농공은행은 1918년 6월 「조선식산은행령(朝鮮殖産銀行令)」의 공포로, 그 해 10월 조선식산은행에 합병되었다가 8·15광복 후 1954년 현재의 한국산업은행으로 변경·발전되었다.
예금 이자는 정기예금이 6푼5리, 당좌예금이 1전1리, 소구(小口)예금이 1전6리를 예금주에게 주었다. 대출 이자는 부동산 담보 대부가 4전2리 이하, 동산담보 대부가 4전2리 이하, 할인 수형(手形)이 4전 이하의 이율을 은행이 받았다.
농공자금과 상업자금 융자 및 예금업무를 수행하였다.
1914년 현재 총 예금액이 5071만 1930원이고, 총 대출액이 1억 2823만 3335원이었다. 대출금 중에서 농공자금이 5402만 8685원, 상업자금이 7420만 4650원을 차지하였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과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본인의 금융 진출, 특히 충주의 금융 진출을 알 수 있는 주요한 자료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성내동 조선식산은행충주지점(城內洞 朝鮮殖産銀行忠州支店) (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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