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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월동 목사 이정로선정비(丹月洞 牧使 李正魯善政碑)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단월동 목사 이정로선정비(丹月洞 牧使 李正魯善政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4. 10. 11. 06:44

단월동 단월대교옆의 새로 조성된 비석들입니다. 그 동안 달천동의 이곳 저곳에 산재되어 있던 비석들을 한군데로 모아 비석을 개립하였습니다. 달천강다리에 있던 충주목사들의 비석과 함께 엽연초 생산조합내에 있던 비석3기 그리고 단월동 길가에 위치했던 면장의 비석까지 한군데로 모아 정비하였습니다.

 

충주목사를 지낸 이정로의 비석은 충주에만 몇 기 아직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단월동,상가흥,금가면등에 자리하고 있습니다.상가흥과 금가면의 비석도 모두 처음의 자리는 아니며 이곳 저곳에 있던 비석들을 다른 비석들과 함께 모아 놓은 것입니다.단월동의 비석은 비신이 깨어져 접합하여 놓았습니다.

 

비석에는 행목사이후정로애민선정비(行牧使李侯正魯愛民善政碑)라고 적혀있습니다.비석의 건립시기는 1877년인 정축년(정축년) 3월 입니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승정원일기 2817책 (탈초본 131책) 고종 12년 9월 3일 병신 47/60 기사 1875년  光緖(淸/德宗) 1년
○ 三政。 吏批啓曰, 淸州牧使, 今當差出, 而本州以營下劇邑, 物衆地大, 素稱難治, 不可不擇差。 他道有聲績未準朔守令, 竝擬, 何如? 傳曰, 允。 以趙秉益爲淸州牧使, 李正魯爲忠州牧使

 

이정로는  1858년(철종 9)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가주서·초계문신(抄啓文臣)·용강현령·부교리·정언·응교를 거쳐, 1863년(고종 1) 『철종실록』낭청(郎廳)·부호군이 되었다. 1870년 성균관대사성 및 각조의 참의를 거쳐 1875년 경주부윤을 거쳐 충주목사로 부임했다.

1880년 이조참판을 거쳐 1891년 도승지가 되고, 예조판서와 의정부좌참찬을 지내고 이듬해 공조판서·예조판서·한성부판윤·의정부좌참찬을 지냈다. 1893년 동지정사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여 중국의 철도 부설 등을 보고했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난 후 형조판서에 이어 이조판서가 되어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 관여했다.

1895년 복수청(復讎廳)을 설치하여 을미사변 때 폐비에 관계된 자들을 정법(正法)할 것을 상소했다. 1896년 궁내부특진관이 되고, 1898년(광무 2) 산릉도감제조로 능 관리를 소홀하게 하여 철도(鐵島) 유배 처분을 받았다가 풀려나 중추원1등의관·봉상시제조·경효전제조 등 궁내부 각 아문의 장을 지냈다. 1910년 경술국치 후 일제의 남작(男爵) 작위를 받았다.

 

이정로의 불망비는 충주지방에 다수 분포되여 있다.(가흥리비선거리,금가면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