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엄정면 윤해영송덕비(嚴政面 尹海英頌德碑)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엄정면 윤해영송덕비(嚴政面 尹海英頌德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1. 4. 26. 16:17

 

 

 

 

윤해영 씨는 서울에서 상업학교를 다니다가 1919년 3·1운동 후에 졸업하고 내려와 목계 금융조합에 취직을 하였는데 발령이 나지 않자 일본으로 건너가 15마력과 16마력 발동기를 사와 방앗간을 세우고 도정 사업을 시작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엄정, 소태, 산척, 금가, 앙성, 동량면 등에서 공출로 받은 벼를 도정했고, 해방 후에도 정부미를 도정했다.

충주 북부 지역에서 공출 받은 벼의 양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1,000석 이상을 저장할 수 있는 큰 창고도 있었다. 영단 방앗간은 도정 사업과 관련하여 마을 사람들을 노동자로 썼기 때문에 고용 창출 효과를 얻을 수 있었고 마을 사람들의 생활 향상에도 일정 역할을 하였다. 또 도정 과정에서 나오는 각종 부산물을 당시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어렵게 살아가고 있던 목계마을의 사람들과 인근 지역의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어 굶주림을 면하게 해주었다. 명절 때는 가래떡을 만들어 어려운 이웃들에게 돌려주어 조상들을 모시고 제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하였다. 평소에도 불우이웃돕기에 앞장서서 마을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특히 목계초등학교를 설립할 때 부지(敷地)를 희사하였으며, 건물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목재를 불법으로 구입하였다고 밀고를 당하여 경찰서에 드나드는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윤우식 씨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는 방앗간을 운영하여 많은 돈을 벌자 학교를 세워 우리 마을의 아이들을 가르쳐보자는 뜻을 세우셨어. 그 시절에는 장마가 질 때면 목계강 변에는 수박, 돼지, 집지을 때 쓸 만한 통나무들이 떠내려 왔어. 그럴 때가 되면 마을 사람들은 강변으로 나가 위험을 무릅쓰고 물건을 건져 올렸어. 많이 건져 올린 사람들은 10~20여 개씩이나 되었지. 아버지께서는 마을 사람들이 건져 올린 재목들을 사들여서 송판을 켜서 학교 지을 건축 자재를 마련하셨어” 라고 하였다.

 

이어서 학교 지을 때 비화(秘話)가 있었는지를 여쭤보았다.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지. 해방되면서 바로 학교를 짓기 시작하였는데, 학교를 짓는 중에 마을 사람 3명이 경무대 경찰서에 ‘개인이 학교를 짓는다’ 고 투고(投告, 필자주:投書를 말함)를 했어. 이 말을 전해들은 아버지께서 경무대에 올라가서 이승만 대통령께 해명을 하셨어. 일제강점기에 공출미를 찧는 방앗간을 운영하여 돈을 꽤 많이 벌었는데, 제가 사립학교를 설립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동네 아이들이 엄정국민학교를 다니는데, 멀기도 하고 여름에 장마가 지면 냇물을 건너지 못해서 학교를 결석하는 일이 있어서 제가 학교를 지어 나라에 기부체납을 할 것이라고 하셨지. 이 말을 들으신 이승만 대통령께서 훌륭한 일을 한다고 칭찬을 하시고 짚차를 내주셔서 목계까지 짚차를 타고 내려오셨지. 학교를 다시 짓기 시작하자 당시 엄정면 민선 면장이었던 이효승 면장이 면소재지가 아닌 목계에 왜 학교를 세우느냐고 도청에 항의하자 누군가 연락을 해줬어. 아버지께서 도청에 찾아가 대통령이 허락한 사실을 이야기해서 학교 건축은 다시 시작되었어. 목계 주민들이 학교 짓는데 정말 열심히 협조해줘서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어. 그 결과 6·25 전에 학교가 개교하게 되었지” 라고 말씀해 주셨다.
『목계면지』의 기록에 보면 1948년 9월 1일 엄정초등학교 목계분교장으로 개교한 것을 알 수 있다. 위와 같이 마을의 주민들을 위해 베푼 선행을 잊지 않고 영원히 기리기 위해 마을 주민들이 뜻을 모아 ‘목계줄다리기·별신제 유래비’ 옆에 1988년 9월 12일에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고 한다.

 

송덕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公)은 파평윤씨(坡平尹氏) 소정공(昭靖公)의 13세손(三十一世孫) 해영(海英)이시며 1906년(一九○六年) 충청북도(忠淸北道) 충주군(忠州郡) 엄정면(嚴政面) 목계(牧溪)에서 부친(父親) 진국씨(鎭國氏)의 차자(次子)로 태어나셨다. 공(公)은 천품(天稟)이 과묵(寡黙) 정직(正直)하신 분으로서 일찍이 한문수학(漢文修學)과 인천상업고등학교(仁川商業學校)를 졸업(卒業)하고 목계(牧溪) 금융조합(金融組合)에 근무(勤務)하시다가 부친(父親)의 사업(事業)을 계승(繼承)하여 근대적(近代的) 정부도정공장(政府搗精工場)을 운영(運營)하시면서 동회장(洞會長)과 국민회엄정면의회의원(國民會嚴政面議會議員) 및 중원군농협감사(中原郡農協監査) 等을 역임(歷任)하시었고 특히 2세(二世) 국민교육(國民敎育)에 힘을 기울여 1948년(一九四八年) 목계국민학교기성회장(牧溪國民學校期成會長) 재직(在職) 中 부지(敷地)와 건물(建物)을 희사(喜捨)하여 목계국민학교(牧溪國民學校) 개교(開校)에 큰 공(功)을 남기셨으며 평소(平素) 위민구휼(爲民救恤)하는 정신(精神)으로 목계근대화(牧溪近代化) 발전(發展)에 헌신(獻身)하신 공로(功勞)가 다대(多大)함으로 농림부장관상(農林部長官賞) 및 각기관장상(各機關長賞)을 수회(數回) 수상(受賞)하시었으니 공(公)의 업적(業績)은 후대(後代)에 귀감(龜鑑)이 되리라. 1978년(一九七八年) 4월(四月) 26일( 二十六日) 향년(享年) 72세(七十二歲)로 영면(永眠) 두무소山 선영하(先塋下)에 안장(安葬)되시니 동민(洞民)들이 공(公)의 유덕(遺德)을 경모(敬慕0하여 영세불망(永世不忘)코자 이 비(碑)를 세움.

서기 1988년 9월 13일(西紀 一九八八年 九月 十三日)

목계 동민 일동(牧溪 洞民 一同)’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