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문백면 사양리 이정묘갈(文白面 思陽里 李挺墓碣)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진천군(鎭川郡)

문백면 사양리 이정묘갈(文白面 思陽里 李挺墓碣)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5. 3. 23. 06:57

사양영당 뒷쪽 이정과 그의부인 무덤앞에 자리하고 있는 이정의 신도비입니다.신도비는 거북대좌 위에 높이 181㎝, 너비 76㎝, 두께 32.5㎝의 비신을 세우고 가첨석을 올렸다. 비문은 권근(權近)이 짓고 이정의 아들 이거이가 세웠다.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추증추충직절 수문병의 보조공신追贈推忠直節守文秉義輔祚功臣 특진보국숭록대부特進輔國崇祿大夫 문하우정승 판도평의사사사 병조사 수문전태학사門下右政丞判都評議使司事兵曹事修文殿太學士 영예문 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 서원백西原伯 시諡 문간공文簡公 행광록대부行光祿太夫 형부상서 집현전학사刑部尙書集賢殿學士 이공李公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竝序영락永樂 원년元年 가을 8월에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이공李公이 선군先君의 묘비명墓碑銘을 나에게 부탁하여 말하기를, “우리 선군자先君子께서 덕을 심고 열매를 먹지 아니하여 우리 후손들에게 그 덕을 끼쳐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뒤에 우리 부자父子가 임금의 총애와 영광을 입어 지위는 높고 봉록은 두터워서 선대先代에게까지 벼슬이 추증追贈되게 되었습니다. 그 일로 분황焚黃하고 제사를 올려 임금의 은총을 밝힌 일은 있었으나 묘도墓道에는 아직도 비문碑文을 세우지 못하여 후세後世 사람들에게 보여줄 길이 없습니다.그리고 제가 불행하게도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으며 세 명의 형님도 모두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만 선인先人의 덕행德行을 상세하게 얻어들을 수가 없었으므로 이 일이 인멸湮滅하여 전해지지 못할까 두려울 뿐입니다. 그대는 세계世系와 선인이 역임歷任했던 벼슬을 상고하여 그를 위해 명문銘文을 지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나는 사양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삼가 상고하건대, 이씨李氏는 청주靑州가 관향貫鄕이니, 나라의 명망 있는 가문으로 가장 드러났으며 또 오래 되었다.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창업創業할 때, 휘諱 능희能希란 분이 계셨는데, 고려 태조를 도운 공으로 국공國公에 봉해졌고, 기린각麒麟閣에 화상畵像이 걸리는 은혜를 입게 되었다. 그의 6대손代孫인 휘 공승公升에 이르러서는 지조志操와 행실이 고결高潔하였고, 인종仁宗과 의종毅宗을 도왔다.일찍이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금金나라에 갔으나 한 닢의 돈도 받지 않았으므로 청렴하고

고결한 덕행이 더욱 드러났다. 하루는 의종 임금이 한가위에 달구경을 하였는데,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왕이 오래도록 감탄하며 아름다워 하다가 이르기를, “오늘 밤의 밝은 달은 마치 공승公升의 가슴속 같아서 한 점의 티끌이 없구나.”라고 하였다. 사망한 뒤에 ‘문정文貞’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위아래 수백 년 동안에 자손들은 조상의 덕업을 이어 받들어 아름다움을 이룩하여 대대로 덕 있는 이가 서로 이어 오더니, 문간공文簡公에 이르러서는 더욱 스스로 경계하고 신칙申飭하여 후손에게 경사慶事를 끼쳐주었다. 사평공司平公은 그의 아들 상당군上黨君과 마음을 합하고 힘을 다하여 우리 이씨 조선에 거듭 정사좌명定社佐命의 공훈功勳이 있어서 공신으로서 훈맹勳盟에 함께 피를 마셨으며, 모두 정승의 높은
벼슬에 올랐다. 상당군과 그의 아우 청평군淸平君은 모두 공주에게 장가들었으니, 선善을 쌓아 남긴 경사가 더욱 크고 창성昌盛하다. 아, 성대盛大하도다.
문간공文簡公의 휘는 정挺이니, 예전 이름은 춘길春吉이다. 태정泰定 을축년(1325, 충숙왕12)에 공이 29세로 처음에 문음門蔭으로 팔관보 판관八關寶判官이 되었고, 다음해 과거에서 병과丙科 제2등으로 급제及第하였다. 봉거 직장奉車直長에서부터 전법 좌랑典法佐郞을 역임하였으며, 치화致和 원년(1328, 충숙왕 15)에는 판도정랑版圖正郞으로 나가서 지초계군사知草溪郡事가 되었는데 어진 정치를 한 바 있다. 그 뒤에 감찰·장령·전법 총랑典法摠郞·경상도 찰방에 차례로 임명되었다. 그리고는 10년 동안을 한가롭게 살면서 조용히 노닐며 편안하게 지내다가 지정至正 계사년(1353, 공민왕 2)에 다시 중정中正·성균 제주成均祭酒에 임명되었고,봉순대부奉順大夫 판전교시사 진현관제학判典校寺事進賢館提學으로 추자追資되었다. 갑오년(1354, 공민왕 3)에는 정순대부貞順大夫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가 되었으며, 을미년(1355, 공민왕 4)에  판위위시사 보문각제학判尉衛寺事寶文閣提學이 되었고, 위계位階는 봉익대부奉翊大夫로 높아졌다. 조금 뒤에 우상시右常侍로 전임轉任하였고, 정유년(1357, 공민왕 6)에는 영록대부榮祿大夫 우산기상시 집현전학사右散騎常侍集賢殿學士로 고쳐 임명되었다. 무술년에는 광록대부光祿大夫 형부상서刑部尙書가 되었으며 관직은 전과 같았다. 이것이 그가 역임한 벼
슬이다.공은 일찍이 청렴하고 검소한 것으로써 스스로를 다스렸다. 예법禮法을 따라 실천하고 세속世俗에 따라 굽히고 펴고 하는 일을 하지 아니하니, 세속 사람들이 그의 바르고 곧음에 탄복하였다. 진주鎭州의 상산常山에 물러가 살면서 벼슬과 영달榮達을 구하지 아니하였다.공민왕恭愍王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부터 오래 그가 어질다는 명성을 들었으므로 왕위에 오
르자 공을 불러 서울에 올라오도록 하고, 그의 맑고 삼가는 것을 가상히 여겨 내불당內佛堂의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임금께서 문정공文貞公의 절조節操와 행적行蹟의 대강大綱과, 의종임금이 달을 보고, ‘오늘밤의 밝은 달은 공승公升의 가슴속 같아서 한 점의 티끌도 없구나.’라고 감탄하여 칭찬한 말을 친필로 쓰고, 이어 공의 뜻이 선조先祖의 뜻을 사모하여 세상살
이의 욕망을 담박하게 하는 일 등, 수백 가지의 말을 써서 내려 주고, 이제 곧 크게 등용하려 하였는데, 공이 갑자기 전에 은거隱居하던 곳으로 돌아가 신축년(1361, 공민왕 10) 6월19일에 병으로 사망하니, 춘추春秋는 65세였다. 상산常山의 남쪽 기슭에 장사葬事하였다.아버지의 휘는 계함季瑊이다. 중대광 낭성군重大匡琅城君인데, 시호는 정헌正憲이다. 할아버지의 휘는 창우昌祐이니, 판도총랑版圖摠郞을 지냈고 광정대부匡靖大夫 밀직사사 전리판서 상장군密直司使典理判書上將軍에 증직되었다. 증조曾祖의 휘는 장粧이니, 조정대부朝靖大夫 전중감殿中監을 지냈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지문하성사 상장군 판예조사知門下省事上將軍判禮曹事에 증직되었다. 바로 이 분이 문정공文貞公의 아들인 참지정사叅知政事 휘 춘로椿老의 아들이다.외할아버지는 광정대부匡靖大夫 도첨의참리 집현전태학사 동수국사都僉議參理集賢殿太學士同
修國史를 지냈고 시호가 문신공文愼公인 김변金胼으로, 언양彦陽 사람이다. 부인夫人은 명주 김씨溟州金氏니,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를 지냈고 광록대부光祿大夫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에 증직된 계초繼貂의 따님이다. 향년享年이 70세로써 공보다 15년 뒤인 홍무洪武 을묘년 4월 21일에 사망하여 공의 무덤 곁에 장사하였다. 또 그 뒤 20여 년 뒤에 사평 부사司平府事의 공功으로 공에게 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 서원백西原伯을 추증追贈하고, 부인에게는 변한국부인卞韓國夫人을 봉하였으니, 공신의 조상에게 미루어 주는 은전恩典이었다.
슬하膝下에는 4남 2녀가 있다. 맏아들 유신由伸은 임오년 과거에 급제하고 형부 낭중刑部郞中으로 경상도 안찰사로 나갔는데, 공보다 먼저 사망하였다. 둘째 아들 거인居仁은 검교檢校·의정부 좌정승議政府左政丞을 지냈고, 시호는 공절恭節이라 한다. 다음 셋째 아들 거의居義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냈고 일찍이 사망하였다. 다음 넷째 아들 거이居易는 문하 좌정승門下左政丞으로 지금 분충장의정난정사좌명공신奮忠仗義靖亂定社佐命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판우군 도총부제부사判右軍都摠府制府事가 되었다. 맏딸은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 이숭李崇에게 출가出嫁하였고, 다음 둘째 딸은 가정대부嘉靖大夫 공안 부윤恭安府尹 민경생閔慶生에게 출가하였다. 손자와 손녀가 약간 명이 있다. 맏아들인 낭중郞中은 상서尙書 홍승조洪承祚의 딸에게 장가들어 자녀를 낳았는데, 큰아들 덕윤德閏은 호군護軍의 벼슬에 있고, 다음 둘째 아들 부윤富閏은 중직전건경中直殿巾卿의 벼슬에 있다. 맏딸은 정당문학 겸 사헌부대사헌正堂文學兼司憲府大司憲 이지李至에게 출가하였고, 둘째 딸은 대호군大護軍 김소金紹에게 출가하였다. 둘째 아들인 공절恭節은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 조익청曹益淸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았으나 모두 어리다. 한산군漢山君 이광우李光雨의 딸에게 두 번째로 장가들어 자녀를 낳았는데, 굉도宏道이고 사수감승司水監丞의 벼슬에
있다. 맏딸은 판사判事 박전의朴專誼 - ‘전傳’ 자字가 문집文集에게 ‘부簿’ 자로 되어있다. - 출가하였고, 다음 둘째 딸은 군자주부軍資主簿 양중관梁仲寬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음 셋째 딸은 호군護軍 권계權繼에게 출가하였고, 다음 넷째 딸은 공조의랑工曹議郞 노경盧敬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음 다섯째 딸은 도염서승都染署丞 심총沈聰에게 출가하였다. 셋째 아들인 공조전서는 호군護軍 김인회金仁晦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는데, 곤륜崐崙이고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의 벼슬에 있다. 넷째 아들인 영사평부사는 형부 상서刑部尙書 최연崔堧의 딸에게 장가들어 자녀를 낳았는데, 맏아들 저佇는 분충장의동덕정난폄사좌명공신奮忠仗義同德靖難窆社佐命功臣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찬성사 판호조사 판좌군 도통제부사 겸 판의용순금사사議政府贊成事判戶曹事判左軍都摠制府事兼判義勇巡禁司事 상당군上黨君으로, 태상왕太上王의 딸 경신궁주慶愼宮主에게 장가들었다. 둘째 아들 백관伯寬은 상호군上護軍의 벼슬에 있고, 다음 셋째 아들 백언伯言은 대호군의 벼슬에 있다. 다음 넷째 아들 백강伯剛은 청평군淸平君으로, 지금 임금의 딸인 정신궁주貞愼宮主에게 장가들었다. 다음 다섯째 아들 현儇은 아직 어리다. 맏딸은 전농정典農正 신중선辛中善에게 출가하였고, 둘째 딸은 종부부령宗簿剖令 경지慶智에게 출가하였다. 외손자와 외손녀가 약간 명이 있다. 이 시중李侍中의 소생所生으로, 맏아들 민岷은 가선대부嘉善
大夫 광주목사光州牧使의 벼슬에 있다. 다음 둘째 아들 인嶙은 사재소감司宰少監의 벼슬에 있고,다음 셋째 아들 치峙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연안부사延安府使의 벼슬에 있다. 맏딸은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최안준崔安濬에게 출가하였고, 다음 둘째 딸은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최유경崔有慶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음 셋째 딸은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조준趙浚에게 출가하였고, 다음 넷째딸은 봉례랑奉禮郞 김지金祉에게 출가하였다. 민 공안閔恭安의 소생으로, 맏아들 설渫은 봉정직 예문관 지제교奉正直藝文館知製敎의 벼슬에 있다. 맏딸은 통훈대부通訓大夫 지곡주사知谷州事홍제洪濟에게 출가하였고, 다음 둘째 딸은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평원군平原君 조박趙璞에게 출가하였다. 증손자와 증손녀가 약간 명이 있다. 평녕군平寧君 대림大臨은 지금 임금의 딸경정궁주慶貞宮主에게 장가들었으니, 정승 조준趙浚의 아들이다.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예전부터 공훈이 있는 가문이 두어 대代를 못 가서 한미寒微한 가문이 되는 것은, 대체로 비록 선조가 부지런히 공덕功德을 거듭 쌓았다 하였더라도 자손된 자가 대개 교만하고 사치함이 많아서 지키는 데 삼가지 않았기 때문일 뿐이다. 지금 공은 선대에서 쌓은 덕이 두텁고 은은하게 빛나는 광채가 발달하여 이미 성대하였다. 그런데 사평司平의 부자父子까지도 모두 공경하고 근신勤愼하여 뜻과 절조를 더욱 가다듬어 귀한 체하지 아니하고 자랑하지 아니하며, 선善을 즐겨하고 게을리 함이 없었다. 이는 그 지킴을 더욱 삼가서 선대의 빛을 드날리는 것이니, 후손에게 경사를 끼쳐주는 것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명문銘文을 세워야 마땅하므로,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기름진 서원西原 땅 / 그 근원을 누가 열었는가 / 국공國公이 터를 잡아 / 그 근본을 잘굳혔네 / 그 뿌리 굳건하여 / 

가지와 잎 번성하구나 / 높고 큰 문정공文貞公 / 몸가짐이 맑아서 / 가슴속 티끌 없음이 / 가을달의 밝음과 같았네 / 

밝고도 정성스런 형부상서刑部尙書 문간공文簡公 / 덕행이 있어 예禮로써 처신處身하며 / 세속世俗에 영합迎合하지 않았
네 / 청렴하고 검소함 더욱 돈독하여 / 그 터전에 후하게 덕을 쌓았으니 / 공경公卿도 될수 있고, 정승政丞에도 알맞건만 / 마침내 시용施用하지 아니하고 / 경사慶事를 뒤로 물려서 / 후손後孫에게 넉넉함을 남겨주었네. / 사평司平을 계도啓導하니 / 준엄하고 씩씩하여/ 충성은 사직社稷에 있고 / 공로功勞는 맹부盟府에 간직하였네. / 부자父子가 두 번이나 맹세하여 / 임금의 큰 사업을 함께 도우셨네. / 형제 모두 훌륭하여 / 임금의 딸 맞이하니 광채 나는 은총의 빛 / 옛날에도 비길 데가 없구나. / 모두 법을 잘 지키고 / 더욱 지조志操를 삼가니 / 복록福祿은 끊임이 없고 / 전렬前烈 더욱 빛이나 / 면면한 그 후손 / 길
이길이 이어가리. / 이 사연을 비석碑石에 새겨 / 영원한 후세後世에 밝게 보이노라.추충익대좌명공신推忠翊戴佐命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참찬 의벙부사 판예조사 지경연 춘추성균관사參贊議政府事判禮曹事知經筵春秋成均館事 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은 글을 짓고, 전前 통덕랑 형조 도관정랑通德郞刑曹都官正郞 이모李某는 글씨를 쓰다.
영락永樂 원년元年 계미년(1403, 태종 3) 10월 일에 넷째 아들인 분충장의정난정사좌명공신奮忠仗義靖難定社佐命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판우군 도총부 제부사判右軍都摠府制府事 거이居易는 비석碑石을 세우다.

 

비문은 앞부분에서 영락永樂 원년元年 가을 8월에 서원부원군 이거이李居易가 부친의 묘비명을 부탁해왔다는 내력을 전하고 이후 세 부분으로 나누어 간략한 내용을 기록하였다. 첫째는 청주 이씨의 내력을 기록하였다. 둘째는 공의 행장에 대한 기록이다. 출생으로부터 관직 생활 그리고 돌아가시기까지의 행적과 관련된 크고 작은 사건들을 서술하였다. 셋째
는 다른 비문에서와 달리 부친으로부터 시작하여 조부, 증조부 그리고 외조부에 이르기까지 다시 한번 기록하고, 이어 부인과 슬하에 두었던 4남 2녀에 대한 행적을 상세하게 서술하였다. 넷째는 비명碑銘을 기록하였고, 마지막으로 비문의 찬자와 서자 그리고 비석을 세운 이를 밝히고 있다. 청주 이씨의 인맥과 그 역사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