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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읍 교동리육영수여사생가-1(沃川邑 校洞里陸英修女史生家-1)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옥천군(沃川郡)

옥천읍 교동리육영수여사생가-1(沃川邑 校洞里陸英修女史生家-1)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1. 5. 9. 21:15

 

 

 

 

 

 

 

 

 

 

 

 

 

 

 

 

 

 

 

 

 

 

 

 

 

 

 

 

 

 

 

 

 

 

 

사랑과 봉사의 화신으로 국민으로부터 많은 추앙을 받았던 육영수 여사가 1925. 11. 29 태어난 장소이며, 현재 건물은 없지만 1600년대 김정승 이후 송정승, 민정승이 거주 하여 삼정승의 집이라 불리던 조선 상류계급의 건축구조를 갖춘 가옥이 있었던 곳이다.
1920년 육영수여사의 부친 육종관이 민정승의 자손 민대감에게서 매입하였다

육영수여사의 생가를 복원해서 관리되고있다

충청북도 기념물 제 12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육영수(陸英修, 1925년 11월 29일 충북 옥천 - 1974년 8월 15일 서울)는 대한민국의 교육자, 사회사업가이자 대한민국 제5,6,7,8,9대 대통령 박정희의 영부인이다. 박정희의 두번째 아내이며, 정치인 박근혜, 사업가 박지만, 박서영의 어머니이다. 충북 옥천공립여자전수학교에서 교사로 1년여 간 재직한 바 있다.

 
 
 

[편집] 생애

[편집] 생애 초기

충청북도 옥천에서 지역 유지였던 육종관과 이경령의 1남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육종관은 대지주였으며 여러 첩을 거느리고 있었다. 육영수는 대지주가의 장녀로 여러 친형제 자매와 이복 형제자매들과 함께 생활했다.

1938년 죽향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배화고등여학교에 입학하였다. 배화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45년 20세 때 옥천공립여자전수학교에 부임, 가사 과목 교사로 1년3개월간 재직했다.[1]

[편집] 결혼 생활

1950년 소개로 당시 육군 중령이던 박정희를 만났으며 6·25전쟁중인 1950년 12월 박정희와 결혼했다.[1] 박정희 대통령과의 사이에 근혜, 서영, 지만 등 1남 2녀를 두었다. 아버지 육종관은 그의 결혼을 반대하였으나, 그는 어머니 이경령과 함께 충북 옥천집을 나와 박정희의 임지였던 대구에서 하숙하였다.[2]

1963년 부군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영부인으로 청와대로 이주하였다.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공관에 있을 시절 육영수의 주된 관심은 민원 처리였다. 제자이며 6년 동안 영부인실 비서관으로 근무한 정재훈씨는 “되도록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어 거리의 여론을 수집하고, 하루 수십통의 민원은 일일이 처리지침을 남겼으며, 특히 억울한 민원현장에는 비서들이 늘 발로 달려가도록 했다”고 전한다.[1]

이러한 관심은 자연히 남편 박정희의 대통령 직무 수행에 대한 적극적인 의견 개진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청와대 안의 제1 야당'이라는 별명으로 일컬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대해 박정희는 육영수와 함께 참모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내 옆에 지독한 야당 총재께서 앉아 계시니 알아서 조심들 합시다."라는 식의 농담을 하기도 했다.[3]실제로 육영수 여사는 남편 박정희 대통령이 1963년군정 5년 연장을 미국 대사에게 선언하자 이동원 대사를 불러 남편이 군정 연장을 취소할 것을 설득하도록 도움을 청했다고 전해진다.[1]

[편집] 사회 활동

[편집] 교양수업

육영수 여사는 정치외교사, 국사, 영어 등 다방면에 걸친 강의를 저명한 대학교 교수들로부터 매주 들음으로써 정치와 사회문제에 새로운 안목을 넓혀나갔다.[1]

[편집] 사회봉사

육영수는 항상 한복 차림에 단아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소박한 인상을 주었고, 가정에서도 남편에게 성실한 아내였다. 또한 어린이보건에 관심이 있어서, 몇 차례 고아원과 보육원에 가서 어린이들의 보건에 대한 정책을 펴보기도 하였다. [4]좋은생각》 기사에 따르면 육영수 여사는 간식을 준비했다가 청와대를 지키는 경찰들에게 선물할만큼 따뜻했으며, 자녀들에게 청와대에서 쓰는 물건들은 국민의 세금으로 산 것이니 종이 한 장도 개인용도로 쓰면 안 된다고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편집] 자립중심의 사회봉사

육영수는 전국 한센병 환자(나환자)촌을 직접 방문하여 자활사업을 지원하였으며, 1964년 9월부터 베트남에 파병된 파월장병 가족들을 찾아 위로,위문하였다. 또한 풍수해 현장에 를 맞으며 달려가 재난당한 사람들을 위문하였다. 1968년 서울대학교기숙사 정영사의 설치를 주관했고 1969년 4월 어린이 복지재단인 육영재단을 설립하였으며 어린이날에 맞춰 어린이 대공원, 어린이회관의 건립을 주도하였다.[5] 1972년에는 부산 어린이회관을 기공하였다. 육영수는 직접 소년소녀 잡지 ‘어깨동무’를 발간하여 농어촌 어린이에게까지 배포하고, 1973년 불우 청소년과 빈자들을 대상으로 한 직업훈련 기관 정수직업훈련원을 설치하였다. 육영수 여사가 이렇듯 활발한 사회봉사를 한 이유는 직업을 갖도록 하는 직업훈련위주의 사회복지가 빈곤퇴치의 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육영수 여사는 빈곤과 소외와 싸워야 했던 한센병 환자들이 자기 힘으로 살도록 돼지를 키우도록 장려하였으며, “진정한 정신을 갖는 인간회복을 내 안에 정립시켜 생활의 자리를 여러분 스스로가 쟁취하는 것이… 여러분들이 숙명처럼 살아온 빈곤과 수모와 질병의 역사를 청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잘못 없이 주위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억울한 일이 생겼을 때는 직접 청와대로 연락해 달라."라고 격려하였다. [1]

1974년 청와대에 초대된 어린이를 따라온 어머니가 이 많이 돌아간 안면마비 증세임을 본 육영수는 제일 좋은 침술원을 찾아서 그를 입원시켰는데, 3개월 치료 후 아이의 어머니가 귀향할 때는 집에서 고생한 시어머니께 드리라고 옷감 한벌을 손수 챙겨 8월 14일에 보냈다고 한다.[1]

[편집] 암살

이 부분의 본문은 육영수 저격사건입니다.

1974년 8월 15일 오전 10시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육영수는 박정희 암살 기도 사건으로 인해 문세광이 쏜 총탄에 맞아 죽었다. 범인 문세광이 쏜 처음 총탄이 빗나가자 범인을 저격하기 위해 경호실장 박종규가 연단에서 뛰쳐나왔고, 박종규를 노린 범인의 총탄에 육영수가 맞은 것이다. 박종규 경호실장이 쏜 총탄은 빗나가 합창석으로 튀는 바람에 여고생이었던 장봉화가 죽었다.[6] 2005년 동아일보는 당시 경호원의 실수로 육영수 여사가 죽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는 보도를 하였다[7] SBS다큐멘터리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도 직접 사격을 해보는 실험을 해가면서 육영수의 암살사건에 얽힌 의혹들을 풀고자 하였다.

대한민국 측은 육영수 피살 사건을 조총련의 조종에 의한 범죄로 규정했기 때문에 [8]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적개심과 반공분위기가 훨씬 높아졌다. 반면 일본 측은 이 사건을 문세광 단독 범행으로 규정해서 당시 한일관계가 악화되었다. [9]

 
 
 

[편집] 이력

 
 
 

[편집]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