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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곡면 상평리 안동김씨음성공파재실(甘谷面 桑坪里 安東金氏陰城公派齋室)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음성군(陰城郡)

감곡면 상평리 안동김씨음성공파재실(甘谷面 桑坪里 安東金氏陰城公派齋室)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5. 8. 25. 11:47

 

감곡면 상평1리에 자리하고 있는 안동김문의 재실입니다.

숭모사(崇慕祠)와 경상재(敬桑齋)가 함께 자리하고 있습니다.

 

 

안동김씨음성공파재실( 安東金氏陰城公派齋室)이라는 현판을 걸고 있습니다.

원래 이곳은 재실이 있기 전 서당자리 입니다.

안동김씨는 1592년(선조 25)에 충북 음성군 감곡면 상평1리에 정착하면서 마을 입구에 숲을 가꾸고 정자를 지어 자손들의 교육을 시작했다. 김형식(金亨湜, 1843~1932)은 한양에서 참봉 벼슬을 하다가 낙향을 하고 집안 자손과 인근의 아이들을 교육시켰다.

그 후 지금의 재실[敬桑齋 崇慕祠]이 있는 자리로 옮겼는데, 규모가 안채가 6칸 행랑채가 2칸이었으며, 집터가 300여 평이나 되는 큰 집이었다고 한다. 인근 차평, 방축(이상 생극면), 월정, 원당(이상 감곡면)의 아이들이 왔는데 학생 수가 많아지자 방의 칸을 헐고 책상을 놓고 교육을 시켰다. 선생은 경주김씨였고, 2대는 상평리 박동기씨 이었다고 한다. 선생들의 보수는 문중에서 지급했고 학생들에게는 받지 않았다고 한다. 1934년 5월 1일 상평간이학교가 설립되면서 안동김씨 서당 터 남쪽 일부[약 150평 라신길의 집터(김영식 거주)] 및 서당 소유 전답을 매각한 금원과 문중 보유 현금을 출연(出捐)하고 서당은 없어졌다.[감곡면지]

 

 

숭모사 경상재는 안동김씨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 상촌 향조 휘(諱) 김진강(金震綱)과 입향조 휘(諱) 김대화(金大澕) 공의 제각으로 후손들이 정성을 모아 1989년에 건립하였고, 이후 개보수를 거듭하여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여러번의 중수로 고풍스러운 멋은 없지만 후손들의 숭조사상을 엿볼수 있는 곳입니다.

 

 

감곡면 상평리가 안동김씨세거지가 된 유래는 다음과 같다.

안동김씨 중시조인 상락군개국공 첨의령 시 충렬공 김방경(金方慶)은 조부 김민성(金敏成)의 댁, 경북 안동시 풍산면 회곡리에서 태어나 개성 앵계리에서 사셨고, 문온공파조인 판전교시사 시 문온공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은 개성 수철동 외가댁[급암 민사평(閔思平)]에서 태어나 개성 서재동에 사셨다. 조선이 개국되어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하자 척약재의 손자인 직제학공 김맹헌(金孟獻)이 개성 서재동의 집을 뜯어다가 한양 명례방 수하동(현 수하동 67번지 일대)에 본가(本家)를 이건(移建)하였다. 이후 맹헌(孟獻)-자양(自壤)-예생(禮生)-윤종(胤宗)-진기(震紀)-대섭(大涉)-확(矱)까지 7대를 살다가 외손인 동주 이민구[李敏求, 지봉 이수광의 아들]에게, 이민구는 또 외손인 신필화[申弼華, 상촌 신흠(申欽)의 증손)]에게 상속되었다.
안동김씨 음성 향조인 김진강(金震綱)은 김윤종(金胤宗)의 차자(次子)로 한양 명례방 수하동에서 생장하셨고, 1563년(명종18)~1567년(명종 22)까지 음성현감을 역임한 이후 사헌부 감찰을 지내다가 1580년(선조 13) 졸(卒)하여 감곡면 상평리 상촌에 묻혔다.이와관련 안동김씨가 감곡면 상평리 상촌에 세거하게 된 연유는 김진강의 장인 부사 김연지(金連枝)공이 무남독녀(無男獨女)로 당시의 풍속대로 재산을 따님에게 물려 주고 외손인 안동김씨는 공의 유택을 감곡면 영산리 산32번지에 마련하고, 오늘 날까지 400년 이상 외손봉사를 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상촌마을 자랑비」에 쓰여진 대로 안동김씨 음성 입향조 김대화(金大澕)공은 아버지 묘소를 감곡면 상평리 산12번지에 모시고, 묘하에서 3년 상중 시묘살이를 하였는데 묘막에서 3일1죽(三日一粥)으로 연명하며 한시도 자리를 뜨지 않고 애곡하니 그 효성이 경향일원에 널리 칭송되고 존경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대은암은 명례방 수하동에 있는데, 침교가 시내에 닿아 있다. 앞쪽으로 남산을 마주 보고 있는데, 곧바로 국사당 산중턱으로 이어진다. 옛날에 새로 나라를 세워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상락공 김방경 공의 5대손(6대손의 오기)이자 척약재 김구용 선생의 손자인 김맹헌 공이 직제학으로 있으면서 이사하는 도중에 송도에 있던 집의 재목을 뜯어다가 이곳에다 옮겨 지었는데, 첨정 김자양, 군수 김예생, 절도사 김윤종, 진사 김진기에게 전해져 나(이닌구)의 외할아버지 도사공 김대섭에 이르렀다. 이 집이 재차 전해져 내가 소유하게 되었는데 안채는 선친(지봉 이수광)을 거치면서 수선하여 ‘대은암’이라 하였다. 사랑채는 내가 처음 지은 것인데, 지금은 외손자 신필화에게 돌아갔다.
그 후 40여세에 벼슬길에 나아가시어 사헌부 감찰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통훈대부 품계에 오르셨으나 광해학정(光海虐政)에 밀려 외직인 하양현감으로 전직되어 지방 수령으로서 선정을 하며 공무에 충실하셨으나 날로 혹심해 지는 광해학정에 시달리다 못하여 수차에 긍(亘)한 항변으로 충간하면서 고민하던 중 위로하러 온 유지주민(有志住民)에게 노구와병(老軀臥病)으로 치정(治政)을 할 수 없어 퇴임하였다고 신임수령에게 이르라 하시고 선고묘하(先考墓下) 개미실로 귀향 은거하시다가 인조개옥(仁祖改玉) 후에 복권과 아울러 이조참의에 특증(特贈)되셨다. 그 후로 음성공 묘하에서 자손들이 세거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하양공께서는 묘하에서 자손의 후학을 열심히 훈육하시는 한편 많은 뽕나무를 심어 잠업(蠶業)을 이룩하여 길쌈(명주비단을 짬)을 권장하는 등 삶의 기반을 마련하시고 향촌(鄕村)의 근본과 자손만대가 영원히 번성토록 하기 위하여 스스로 아호(雅號)를 상재(桑齋)라 하시고 다음과 같이 선고묘하의 마을을 명명(命名)하여 남기셨다.


稱其村曰桑村(칭기촌왈상촌) / 뽕나무 심은 이 마을을 상촌이라 부르고
名其里曰助桑(명기리왈조상) / 그 동리 이름을 조상리라 하라.


그래서 현재 상촌(桑村)과 상평리[桑坪里, 상촌 조상리(助桑里)의 ‘桑’자와 성뜰 성평리(城坪里)의 ‘坪’자를 따서 지음)의 이름이 이에서 유래된 것이다.[감곡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