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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왕읍 사창리민영모신도비(金旺邑 社倉里閔令謨神道碑) 본문
본관은 여흥(驪興). 고려시대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민의(閔懿)의 아들이다. 처는 배씨(裵氏)이며 아들로 민식(閔湜)·민공규(閔公珪)가 있다. 배씨의 동생은 유익겸(柳益謙)의 처가 되었다. 민영모는 인종·의종·명종 때 활동한 인물로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다. 민영모가 처음 과거에 응시했을 때 부(賦)를 지었는데 격식에 맞지 않아서 동지공거(同知貢擧) 이지저(李之氐)가 취하려 하지 않자, 지공거 최유(崔濡)가 “이 글의 뜻이 크고 뛰어나 비범한 기개가 있으니 방(榜)의 꼬리에 붙여주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뒷날 최유가 민영모에게 “그대가 지은 부가 비록 격식은 틀렸으나 문구에 원대한 기상이 보였다. 그대는 노력하라”고 하였으니, 민영모의 학문 실력이 훌륭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거쳐 판병부사(判兵部事)가 되었다. 이 때 어사대에서는 병부의 전주(銓注)가 부당하다고 탄핵하였으나 왕이 간곡하게 타일러주기도 하였다. 1183년(명종 13)에는 나이가 늙어서 물러가기를 고하였으나, 이는 문하시랑 평장사인 이광정이 민영모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자 거짓으로 상표(上表)한 것이었다. 이후 민영모는 자청하여 퇴직하고 이광정이 민영모의 자리인 수태부판이부사(守太傅判吏部事)를 차지하였다. 한편 민영모는 겁이 많고 말을 더듬었으며 실천력이 다소 떨어졌다고 하며 정계에 있을 때 청탁을 숨기지 않고 받았으며 전주(銓注)를 함부로 하였다고 전한다.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사창리 민단에 있는데, 묘는 사창리 북동쪽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경모재(景慕齋)[여흥민씨의 사당] 뒤 위쪽에 있다. 묘 둘레는 벽돌 담장으로 둘렀고 앞에는 솟을삼문을 세웠다. 묘 앞에는 묘단비가 있는데 묘지석(墓誌石)이 발견된 이후 단(壇)을 설치하였다. 그의 22대손인 민치상(閔致庠)이 짓고 민규호(閔奎鎬)가 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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