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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미원면 운용리는 본래 청주군 산내일면 지역으로 조선 영조 후반(1750-1776)에는 용기리, 덕촌리, 운곡리로 되어 있었으나 정조 22년(1789)경부터 용기리가 용애리(龍涯里)로 개칭되었으며 상운리와 삼흥리가 새로이 조성되었고 헌종대(1845년경)에는 운송정이 새로 이루어졌다. 1910년 경술국치 직전에는 용애리가 용암리로 개칭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운송리와 운곡리의 일부를 운교리로 일부를 화원리로 넘겨주고 상운동과 용암리의 이름을 따서 운용리라 하여 미원면에 편입 되었음. 자연부락으로 소새울, 양달말, 음달말이 있다. 갈미봉 : 소새울 남쪽에 있는 산으로 갈모처럼 생겼다. 군용고개 : 소새울에서 중리 막은골로 가는 고개 군장골고개 : 소새울에서 화원리 새왕이로 가는 고개 능고개 : ..
종암리는 본래 청주군 산내일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하적리, 화암리, 농곡리와 손목포리(孫木浦里), 성화리(盛化里), 분치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종암리라 해서 미원면에 편입됨. 자연부락으로 관사터, 무주리, 벌말, 소란, 용소골, 주막거리가 있으며 현재는 종암1,2리로 분리되어 있음. 자연마을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무주리(舞笑里, 盛化) : 삼거리에서 증평으로 가는 군도 우측 도로변 언덕바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 뒷 산형이 선인이 춤을 추는 형상이라 한다. 벌말(下赤) : 내수로 넘어가는 지방도 우측에 접한 마을. 삼거리(주막거리) : 증평, 내수, 미원으로 가는 세갈래 길이 있는 곳에 위치하여 내수나 증평장을 보러 가는 행인들이 이곳에서 목을 축이고 쉬어갔다고 한다. 소란(花岩)..
상삼리는 현도면 최북단에 위치하며 동은 죽암리, 서는 부용면 등곡리, 부용면 문곡리, 북은 부용면 외천리와 경계한다. 현재 약 90여 세대에 2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상삼리는 윗 세거리 길이라는 의미이며, 본래 문의군 이도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삼리 일부가 부용면 외천리에 합쳐지고, 평리를 병합하여 상삼리라 하여 현도면에 편입되었다. 동재궁 : 보성오씨 시조의 l4세손인 경례의 산소를 수호하는 산직집이 있는 마을 서재궁 : 보성오씨 시조의 14세손인 경인의 산소를 수호하는 산직집이 있는 마을 옻나무골(큰말) : 상삼기리 동쪽에 있는 마을로 큰 옻나무가 있어 지어진 마을. 대문중 : 보성오씨 시조의 10세손인 인후의 산소를 수호하는 기양사(岐陽詞)를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 돌..
고당리는 옛 기록이 없어 그 연혁을 찾아보기 힘들다. 임진란 때 유(劉)씨(유득송)가 처음 이곳으로 피난을 와서 울창한 송림 속에 함지박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유지하였다는 말만 전하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일제 조정할 때 고당리라 하여 옥천군 청남면에 속해 있다가, 1929년 청성면이 생기면서 이에 속하게 되었다. 고당리라 부르게 된 것은 자연마을들을 합쳐서 한 마을로 이름 지으면서 고현(高峴)의 고(高)자와 원당(元堂)의 당(堂)자를 한자씩 취하여 고당리라 하였다. 고현(高峴)은 “높은베루”를 한자로 쓰면서 높을 고(高), 고개 현(峴), “높은 고개”라는 뜻으로 고현이라 하였는데 원뜻은 “벼루”란 옛말로 “벼랑” “언덕”이란 말이 되므로 “높은 벼랑”이란 뜻이다. 이곳 지형을 볼 때 “높은 벼랑..
도율리는 도촌(道村)과 율티(栗峙)가 합하여진 마을로서 옛기록에 이 마을만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곳이다. 1914년 행정구역 일제조정때 도가실과 밤티를 합하여 도율리라 이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7년말 현재 도촌에 55호 138명, 율티에 37호 67명이 살고 있다. 도율리라 이름 짓게 된 것은 두 마을을 합치면서 도촌마을의 도(道)자와 율티의 율(栗)자를 한자씩 취하여 도율리라 칭하게 되었다. 도촌은 원래 “도가실”을 한자화할 때 발음대로 “도”를 길도(道)로, “실”을 마을촌(村)으로 사용하여 도촌(道村)으로 부르고 있으나 사실은 옥천~보은의 옛길은 이곳을 지나 월외~장선~동정~회인(보은)으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상인들이 쉬어가거나 물건을 받아가는 도가(都家)가 있어 이 마을을 도가실이..
화학리는 화일리(禾日里)와 학촌리(鶴村里)가 합하여 이루어진 마을이다. 1739년 기록에는 화일리라 하여 74호가 1891년 기록에는 화일리에 22호, 학촌리에 29호 등으로 분구되어 기록되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화일과 학촌이 합하여 화학리(禾鶴里)가 되었다. 1981년 엽송골, 마느실, 학촌이 화학1리로 수일이 화학2리로 분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화일(禾日)리는 수일(壽逸)이라고도 하는데 나이가 많은 고령자가 많기 때문에 수일이라 부르기도 하고 벼농사를 많이 짓기 때문에 화일이라 한다고 하는데 그 유래는 분명치 않다. 화일리는 1972년부터 마을원로회의를 구성하고 가장 민주적인 방법으로 의사결정을 하고 그 실행을 위해 온 마을이 단합하는 모범을 보여왔고 오늘날까지 그 전통이 이어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