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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장암리는 탄부면소재지로부터 서쪽으로 4km 지점에 위치하며 동쪽은 석화리, 서 쪽과 남쪽은 삼승면, 북쪽은 매화·사직리와 접하고 있다. 본래 탄부면의 지역으로서 장수바위가 있어 장바우 또는 장암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경상리(景祥里)를 병합하여 장암리라 하였다 뒷산 청룡혈을 따라 길게 늘어선 마을이 바로 장암1리이다. 장암1리는 지금은 비록 일부가 사라졌지만, 그 웅장한 장수바위를 마을 한가운데 품고 터를 잡아 수백 년을 살아온 터전이다. 장암1리보다 장바우(壯 岩)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웃말 뒷산 ‘원고지재’ 옆에 있는 ‘도덕바위’와 장암2리 ‘증생이’로 가는 곳 에 있는 ‘바우뱅이’바위 등 세 개의 유명한 바위가 있어, 이 곳이 바위가 많은 곳이라 하여..
장암2리는 장바우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이 곳 지형이 가마에 소죽을 끊여 소 에게 먹이는 형국이라고 해 ‘증생(甑生)이’라 불리다가 ‘경상리’로 바뀐 마을이다 마을자랑비의 전문을 대략 옮기면 다음과 같다. 속리산밑 30리 밑에 우복동이 있으니 병화나 흉년이 들지 않는 곳이다. 바로 이 곳이 그 곳이라.산좋고 들좋고 사람살기 좋은 곳이다. 이 곳이 우복동이요 경상리 이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이곳이 장수마을이요 사람마다 다정하고 도로는 포장되여동서로 관통되고 경지는 정리되어 좌우로 펼쳤으니 복받은 주민이요 천헤의 지역이다. 유구한 세원속에서 숱한 전설을 남겼던 마을앞가 둠벙은 1975년 경지정리 후 전지로 변모되었지만 야사는 아직도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다. 세월따라 산천은 변했어도 인정과 아름다운 풍속은 ..
남대문리는 회인이나 대전을 거쳐 오는 길도 있지만, 청주에서는 문의~남대문을 잇는 509번 도로를 많이 이용한다. 북으로 문의면 묘암리, 동으로 거교리, 남으로 수몰 되어 사라진 어성리, 서로 샘봉산 너머 청주시 문의면 염티·소전리와 접해 있다. 본래 회인군 서면 지역으로 호점산성의 남문 밖이 되므로 남대문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만지동, 거구리와 후곡리 일부를 병합하여 남대문리라 하고 회남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로는 거쿠리, 남대문, 만마루가 있으며, 지명으로 가마골, 가마성, 남문, 논골, 느저목골, 돼지골, 뒤견봉, 말바탕, 먹뱅이, 멀티고개, 모악골, 바사리고개, 배나무골, 불무골, 사지뱅이골, 상수리, 성지골, 쇠목골, 안터, 안어성골, 염티골, 용 굴, 우래실, 은정골..
상궁리는 남북으로 길게 자리하고 있으며, 북으로 아곡리, 동으로 이원리와 보은읍 노티리, 남으로 하궁리, 서로는 신궁리와 접해 있다. 본래 보은군 내북면지역으로 궁뜰 위쪽이 되므로 웃궁뜰 또는 상궁평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중궁리 일부를 병합하여 상궁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궁뜰, 양짓말, 음짓말(건너말), 황새말이 있으며, 지명으로는 가장 골, 골바위들, 노태고개, 부새골, 불무골, 삽작재, 선경골, 활미골 등이 있다. 용수삼거리에서 부터 궁저수리 아래까지 논이 형성되어 있다. 23가구 47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궁저수지를 중심으로 형성된 상궁리, 신궁리, 하궁리는 3개의 행정리 이지만, 2010년 둑 높이기 사업으로 많은 주민이 터전을 잃고 고지대로 이전하여 남은 주민이 ..
물안이마을은 1960년대에는 묘골, 주막거리, 안말 등 4개 자연부락에 100호가 살던, 관내에서 제일 큰 마을이었다. 마을에 위치한 수한 치한센터는 1914년 일제강점기에 보은경찰서 수한 주재소로 설치, 운영되어 오다가 1945년 해방 후 수한지소로 개칭되었고, 1996년 수한파출소로 개명되었다가 현재는 수한치안센터로 불린다. 1914년 묘서리에는 양조장, 약방, 정미소, 이발소 등이 있어 수한면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고 한다. 묘서교 옆에 묘서보건진료소가 자리하고 있다. 묘서교 앞에는 마을자랑비와 지름 10cm 정도의 작은 구멍이 뚫린 커다란 돌과 판석이 나란히 놓여 있다. 마을 주민의 얘기에 따르면 소가 끌던 연자방아라고 하는데, 모양을 보아서는 다른 듯하다. 마을 뒤에 자리한 관월암에서 내려다보면 ..
쇠가 많이 나 쇠실이라 불리던 금곡리는 북으로 신추리, 동쪽은 국사봉, 남으로 조곡리, 서로 회인천 건너 거교리와 접해 있다. 본래 회인군 남면 지역으로 1914년 행 정구역 폐합에 따라 지승동을 병합하여 금곡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쇠실(양지뜸, 웃말, 음지뜸), 느티정, 스승골, 없어진 마을로는 깨박골이 있다. 지명으로는 가래울고개, 고개밑, 느티정골, 돼지골, 두루봉, 뒷날, 마당재, 막은골, 매봉재, 문충묏날, 뭉치미날, 배나무골, 삼박골, 서고개골, 서낭댕이고개, 승곡교, 안산넘어골, 우담탁골, 음지뜸도랑, 중뫼, 큰골, 통뫼산소, 푯대날망 등이 있다. 면적은 2.5km2 로, 대부분 산간지역이다. 50가구에 84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전통을 중시하는 마을, 쇠실 │ 금곡리의 중심마을 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