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사과과수원
- 부도
- 효자문
- 밀양박씨
- 충북의 문화재
- 공주박물관
- 공산성 선정비
- 선돌
- 충주박물관
- 청풍문화재단지
- 사인암
- 곡산연씨
- 각연사
- 경주김씨
- 문경새재
- 상당산성
- 한독의약박물관
- 청주박물관
- 문의문화재단지
- 법주사
- 화양구곡
- 화양동 암각자
- 보성오씨
- 부여박물관
-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 단지주혈
- 오블완
- 국립청주박물관
- 효자각
- 티스토리챌린지
- Today
- Total
목록통합청주시 (1606)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월리사 입구의 왼편 언덕에 서 있는 석종형(石鐘形) 부도(浮屠)로서 방형의 편마암계 자연석을 지대석(地臺石)으로 삼고 그 위에 탑신(塔身)을 올려놓은 단순한 형태이다. 합신에는 아무런 문양이 새겨지지 않았고, 상륜부(相輪部)는 연꽃 봉우리 형태로 만들었다. 일제시대 이후 수차례 도괴되어 개울가에 방치되던 것을 마을에 사는 신도들이 복원하였다고 한다 부도에 대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탐신부에 "이구당포윤(離坵堂抱允)" 의 탑으로 병오년 4월 6일에 세웠음이 음각되어 있어 조선후기에 월리사에 주재하던 포윤(抱允) 스님의 사리탑인 것을 알 수 있다. 건립시기는 연호가 없어 정확히 알 수 없다. 규모는 전체높이 107cm, 밑지름 49cm, 중간지름 67cm, 상륜부높이 25cm이며 , 대석은 가로 113cm ..
월리(月裏)란 이름은 절이 높은 곳에 위치해 달과 가까이 있어 그리 불리어진 것이 아닌가 하며, 혹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절 아래에 월동사(月洞寺)가 있었는 데 절이 그 위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이름 붙여진 것이 아닌가 하는 데 믿을 수 있는 지는 의문이다. 절은 옛날에 한 작은 암자였는데 언제 세워졌고 언제 황폐해졌는지 알지 못한다. 1657년(효종 8년)에 명현당(明玄堂) 원학대사(元學大師)가 우연히 절의 기록을 보고 절의 중창하려 돈과 재물 그리고 장인(匠人)과 돌을 마련하였다. 우선 산 아래 신흥사(新興寺)로 재료를 옯겨 두어 우선 불전(佛殿)을 세워 금상(金像)을 봉안하였다. 또 요사(寮舍)와 선실(禪室), 누각, 행랑채, 푸주간, 목욕간 등을 차례로 완성하였으며, 각명(覺明) 신현(..
월리사 요사채이다 지금의 대웅전과 삼성각이 있기전에 불상을 모신 듯 하다 월리사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요사채(寮舍寨)란 사찰에서 전각이나 산문외 건물을 이르는 말로 신도들이 잠깐 쉬고 음식을 먹을 수도 있는 공간등을 말한다
월리사는 신라 무열왕(재위 654∼661) 때 의상대사가 지은 절이다. 의상은 이 절에서 열심히 수도하여 성불하였다고 한다. 대사가 이 절에 있을 때 하늘의 달빛이 해와 같이 밝게 비추는 것에 감탄하여, 절의 이름을 월리사라고 지었다 한다. 그 후 통일신라말 원학대사가 이곳에 옮겨 지었다고 전한다. 석가모니를 모신 대웅전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조선시대에 지어진 건물로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놓인 다포계 건물이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 58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절에서 약 2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마을에서 절로 들어서는 입구에 월리사 표석과 함께 금기사항을 적어 놓은 금비가 세워져 있다. 1825년(순조 25)에 세워진 이비는 전면에 ‘이곳은 불존(佛尊)이 있는 특별한 구역이니 장례를 치르지 말라’는 내용이 적혀 있으며, 뒷면에는 전답을 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