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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보은읍 종곡리 (4)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보은읍 종곡리 마을초입에 자리한 조선 명종 때의 학자 성운(成運)·김천부(金天富)의 신도비이다. 김천부가 을사사화를 계기로 은거하며 학문을 연마하던 건물로 1887년(고종 24) 후학들이 양현(兩賢)을 사모한다는 뜻에서 모현암이 종곡리에 있다. 신도비는 근래에 세운 듯 하다. 김천부는 1498(연산군 4)~1584(선조 17) │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대온(大蘊)이다. 판도판서 김장유의 7세손이며, 증조는 김처용(金處庸), 할아버지는 판관 김증손(金曾孫), 아버지는 부사직(副司直) 김벽(金碧)이다. 보은읍 종곡리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당숙(堂叔)인 충암 김정에게 배우고 1519년(중종 14)에 식년시 진사에 급제하였으나, 그해 기묘사화가 일어나 스승이자 당숙인 김정을 비롯하여..
보은읍 종곡리에 자리하고 있는 김민태 효자문(金玟泰 孝子門)이다. 종곡리에 있는 정문으로 경주인 김민태는 효성이 지극하였고 부모님 병환시에는 밤을 지새워 간호했고 목욕재계하고 기도하는 등 지극한 효행을 하였고 덕행으로 후학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경주인 김극태의 처인 의령남씨의 효열을 기리기 위하여 고종5년(1867년)에 나라에서 정문을 세우도록 명하여 그가 살던집 대문에 편액하였던 정문이다. 정려건축은 마을입구에 독립된 목조정각으로 세워지는 경우와 가옥의 대문간을 정려로 하는 2가지 유형이 있는데 의령남씨 효부문과 같이 가옥의 대문을 정문으로 하는 경우는 충북지역에서는 흔치않는 유례이다. 현재는 집은 없어지고 편액이 걸린 대문만 보존되고 있다. 대문은 정면 3칸 측면1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중앙의 1칸은 솟을대문이고 양측의 1칸씩은 행랑으로 온돌방을 시설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건물구조는 낮은 시맨트 기단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그위에 방형의 기둥울 세웠다. 현재 "효부사인김극태처의령남씨지문(孝婦士人金極泰妻宜寜南氏之門)이란 명정편액이 솟을대문..
준비성이 없음을 탓해야 할꺼다. 조금만 더 신경을 쓴다면 두번 걸음 없으련만 종곡리를 다시 찾았다. 먼젓번 걸음에는 시간에 쫓기느라 제대로 둘러보질 못하고 갔으니 말이다.종곡리를 찾아들어가는 길 좌우로 장승이 한창이다. 생태및 염색등을 체험할수 있는 체험마을로 거듭나고 있다. 경주김씨 소유의 정문이다. 종곡리를 접어들며 우측으로 눈길을 주면 자리하고있다. 김기서 효자문은 정묘년(1867년 고종4년)에 정려되였으며 4년후에 동몽교관과 조봉대부로 증직되였다. 종곡리는 고려시대 판도판서를 지낸 김장유가 이곳에 자리 잡은 이후 약 600여 년 간 대대손손 이어온 경주 김씨의 집성촌이다. 조선조 중종 때 조광조와 더불어 개혁정치를 이끌었던 충암 김정선생의 고향이며, 대유학자인 대곡 성운선생이 학문을 연마하던 곳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