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곡산연씨
- 문의문화재단지
- 밀양박씨
- 공주박물관
- 단지주혈
- 한독의약박물관
-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 부도
- 효자문
- 청풍문화재단지
- 사인암
- 효자각
- 각연사
- 부여박물관
- 문경새재
- 법주사
- 보성오씨
- 경주김씨
- 오블완
- 충북의 문화재
- 티스토리챌린지
- 화양구곡
- 사과과수원
- 선돌
- 화양동 암각자
- 상당산성
- 국립청주박물관
- 공산성 선정비
- 청주박물관
- 충주박물관
- Today
- Total
목록윤사석 (7)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미원면 어암리에 있는 윤사석의 추모비입니다. 어암리는 본래 청주군 산내이상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池旺里, 小岩里, 漁尾里와 芳旨里, 印峯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漁尾와 소암의 이름을 따서 어암리라 하였다. 1982년 1월 행정동리분구로 어미, 지왕, 쇠바우를 어암1리로 인봉, 방마루를 어암 2리로 분구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윤사석은 조선 전기의 선비이다. 성종 때 사헌부집의를 지냈으나 연산군 때 거듭되는 사화로 현인군자들이 희생되는 것을 보고 가족들과 함께 미원으로 내려와 옥화대 위에 만경정(萬景亭)을 짓고 은거하였다. 미원면 옥화리 윤사석유허비,추모비(米院面 玉花里 尹師晳遺墟碑,追慕碑) (tistory.com) 미원면 옥화리 윤사석유허비,추모비(米院面 玉花里 尹師晳遺墟碑,追慕..
윤사석(尹師晳)은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호는 만둔암(晩遯菴)이다.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 옥화리(玉花里)에 은거하였다. 성종 때 사헌부집의를 지냈으나 연산군 때 거듭되는 사화로 현인군자들이 희생되는 것을 보고 가족들과 함께 미원으로 내려와 옥화대 위에 만경정(萬景亭)을 짓고 은거하였다. 이이(李珥)는 ‘그가 평소에 저술한 것들을 은둔생활 중에 모두 불살라버려 후세에 전하는 것이 없으니 애석한 일’이라고 하였다.《동문선》에 그의 시 한 수가 전하며, 용궁(龍宮)의 죽락사(竹樂祠)에 옥화리 숭현사에 배향되었다. 유허비에는 만둔암윤선생유허비(晩遯菴尹先生遺墟碑)라고 적혀 있습니다.
1989년에 건립하였으며 조선 연산군대(1494~1506)에 사헌부 집의 민돈암(晩遯庵) 윤사석이 세운 파평윤씨 정자로 1926년 허물어져 1989년에 재건하였다. 지금의 정자는 1989년에 재건한 건물로 정면2칸 측면1칸 겹처마 팔작지붕에 양회바닥이며 안에는 1989년에 윤지한이 지은 "만경정중수기"를 걸었으며 밖에는 "만경정"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그리고 정자앞에 1989년에 윤지한이 지은 "만경정중건기비"를 세웠다. 지붕에서 누수가 있는지 천막을 덮어 놓았다. 보수가 필요하다. 윤사석은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호는 둔암(遯菴)이다.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 옥화리(玉花里)에 은거하였다. 성종 때 사헌부집의를 지냈으나 연산군 때 거듭되는 사화로 현인군자들이 희생되는 것을 보고 가족들과 함께 미원으로 내..
미원면 옥화리에 있는 파평윤씨집의공파 사당입니다. 주위로는 만경정 세심정등 정자와 함께 옥화서원과 각종 유허비 등이 있으며 송림이 우거져 있습니다. 윤사석은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호는 둔암(遯菴)이다.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 옥화리(玉花里)에 은거하였다. 성종 때 사헌부집..
윤사석(尹師晳)은 조선 전기의 선비입니다. 성종 때 사헌부집의를 지냈으나 연산군 때 거듭되는 사화로 현인군자들이 희생되는 것을 보고 가족들과 함께 미원으로 내려와 옥화대 위에 만경정(萬景亭)을 짓고 은거하였습니다. 만경정 앞에 자리하고 있는 윤사석의 유허비와 추모비입니다. 윤사석은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호는 둔암(遯菴)이다.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 옥화리(玉花里)에 은거하였다. 성종 때 사헌부집의를 지냈으나 연산군 때 거듭되는 사화로 현인군자들이 희생되는 것을 보고 가족들과 함께 미원으로 내려와 옥화대 위에 만경정(萬景亭)을 짓고 은거하였다. 이이(李珥)는 ‘그가 평소에 저술한 것들을 은둔생활 중에 모두 불살라버려 후세에 전하는 것이 없으니 애석한 일’이라고 하였다.《동문선》에 그의 시 한 수가 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