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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임진왜란 (12)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아침 저녁으로 선들거리는 날씨가 한 낮으론 아직도 그 위세가 좋다.연화사에 차를 세우고 모유정으로 오르는 짧은길이 경사도가 있어서 그런지 제법 땀이 흐른다.신발이라도 챙겨신었으면 좋으련만 점심시간에 짬내어 찾았으니 구두를 신고 오르는 길이 조금은 서툴다.지자체에서 부모산을 중심으로 둘레길을 조성하여 한 낮인데도 제법 산행을 즐기시는 분들이 많다. 모유정(母乳井)은 문헌에 기재된 전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래 부모산은 아양산, 악양산(岳陽山) 등으로 불렸다. 임진왜란 때 박춘무(朴春茂)[1544~1611]가 복대동 에서 의병을 일으켜 청주성을 탈환하고 아양산 마저 탈환하여 그 곳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박춘무에게 패전했던 왜병이 아양산에는 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산 주위를 포위하고 보급로를 차단하자 ..
남이면 구암리에 위치하고 있는 민양공 화천당 창의사 박춘무선생의 묘소이다.남이면 구암리에서 청주로 들어오는 길가에 작은 팻말이 보인다. 박춘무는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사육신 박팽년의 아우 인년(引年)의 8세 손이었던 기정(箕精)의 넷째 아들이다.그는 '토정비결'이라는 책을 지은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에게서 배웠다.청주 읍성 탈환의 주역으로 널리 알려진 옥천의 조헌(趙憲)도 박춘무와 함께 이지함에게서 배운 문인(門人)이다. 본관은 순천(順天). 호는 화천당(花遷堂). 찰방(察訪)을 거쳐,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창의사(倡義使)가 되어 의병을 일으키고 조헌(趙憲)과 함께 호서지방을 지키는 데 큰 활약을 하였다.침구술(鍼灸術)이 뛰어나 의관(醫官)으로도 활약하였으며, 뒤에는 지방관으로 1597..
옥산면 덕촌리에 있는 이 열녀각은 1854년(철종 5)에 정검(鄭儉)의 부인 충주 지씨(忠州池氏)의 정렬을 기리어 세운 정려이다. 지금의 열녀각은 1927년에 중수하고1985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이다. 정려의 사면은 홍살로 막고 안에는 열녀문 편액..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 당시 문경현감으로 있었는데, 왜군이 관내에 쳐들어 오자 관병 수십 명을 이끌고 관아를 지키며 결사적으로 항전하였다. 중과부적으로 왜병들에게 밀려 조령(鳥嶺)을 향하여 후퇴하였으나 20여 명의 부하들과 함께 최후까지 항전, 온몸에 부상을 입고 유혈이 ..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에 소장된 정철이 명나라 황후에게 받은 술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당시 명(明)나라의 원병과 함께 그 이듬해인 1593년 4월 18일 서울을 수복하게 되자 조정에서는 정철(鄭澈)을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보내었다. 정철이 소임을 마치고 돌아올 ..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신정리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 법주사의 말사. 용화사(龍華寺)는 속칭 ‘걸미산 미륵당’이라 불린다. 용화사(龍華寺)는 1959년에 비구니 한자심이 신축한 절이다. 본래 고려시대의 절터로서 현재 거대한 석조미륵불입상이 남아 있다. 주변에서 석조여래입상이 발견되어 진천문화원으로 이전하였다가 최근 다시 경내로 이전해 왔으며, 인근의 한 민가에는 석탑 부재가 남아 있기도 하여 옛 사지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이곳의 옛 절터에 대한 문헌 기록은 전혀 없고, 단지 거대한 미륵불상에 대한 일제강점기의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1959년에 대웅전을 신축하였다.용화사(龍華寺)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이곳에 있던 미륵불을 정원에 모시고 있으며, 그 옆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겹..